비발디의 음악은 음색과 분위기가 밝고 드라마틱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작곡가 스스로 열정적인 리듬을 살리고자 했는데, 짧은 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게 비법이었죠. 단순히 빠르고 반복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비발디는 자주 곡 머리에 짧은 시(詩)인 소네트들을 적어 두었는데, 그의 곡을 연주하는 사람은 이 소네트의 각 행에 담겨 있는 감정적이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잘 표현해 내야만 합니다. 웬만한 연주자는 시도조차 어려울 정도죠. 이러한 작곡 기법은 작곡가 자신이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소(Virtuoso,명연주자)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비발디는 아버지에 이어 당대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떨친 명연주자였죠. 현란한 연주 기술만이 아닙니다. 창작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악보를 필사하는 전문 필사자보다 곡을 써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하네요. 음악회를 일반적으로 콘서트라고 하죠?
대중가수들의 공연도 콘서트라고 하는데, 원래 이 말은 클래식 음악에서 협주곡 혹은 관현악을 의미하는 콘체르토(concerto)에서 유래했습니다. 라틴어로 ‘겨루다, 경쟁하다’는 의미와 함께 참여하다는 뜻을 갖는 말인데요. 노래를 포함하는 독주와 합주, 혹은 반주가 함께 나오면서 경쟁하듯 연주된다고 해서 협주를 의미하게 되었죠.
오늘날 모든 음악회가 거의 이런 형식입니다. 대중 공연도 가수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반주하는 밴드가 함께 연주하는 협주 형태이죠. 하지만 단지 이것 때문에 콘서트라고 칭하는 게 아닙니다.
밴드의 구성도 클래식의 관현악 형식과 상관관계가 있죠. 타악기를 비롯해 기타와 같은 관악기, 그리고 건반 악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게 바로 클래식의 관현악 형식에서 왔습니다.
콘서트가 비발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바로 비발디야말로 콘체르토의 선구자라 불러도 좋을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물론 이탈리아에서 콘체르토 형식을 최초로 도입한 작곡가는 코렐리 (Arcangelo Corelli)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작품을 최초로 출판한 작곡가는 바로 비발디였습니다.
1711년에 네덜란드에서 출간한 <레스트로아르모니코 L’Estro Armonico>가 바로 그 작품집입니다. 솔로 바이올리니스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12개의 콘체르토 모음집인데, ‘조화의 영감’ 혹은 ‘화성의 영감’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으로 인해 비범한 작곡가로서 비발디의 명성은 유럽 전체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다들 아시죠? 바이올린 교본으로 유명한 스즈키 바이올린 스쿨 4권에 있는 ‘미 라 라라라’하고 시작하는 a minor 협주곡이 이 중 하나이지요.
비발디 이전까지의 음악은 거의 여러 악기가 함께 소리를 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즉 ‘다성’음악(polyphony)이었죠. 그런데 비발디는 특정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만들어 나머지 악기들이 일종의 반주 형식으로 받쳐주도록 했습니다. <사계>에서 들으셨듯이 솔로 바이올린이 주요 멜로디를 이루며 전체 음악을 주도해 나가죠?
음악사에서 비발디의 공로는 또 있습니다. ‘빠르게-느리게-다시 빠르게’로 이어지는 협주곡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 외에도, 연주자를 예술가로 만든 공로자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때까지 음악인들은 궁정이나 교회, 귀족들의 필요에 따라 소리를 만들어내던 기능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비발디 이후에는 특정 협주곡에서 주요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들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스타일과 예술적인 경지로까지 음을 구현해 내고자 애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단지 작곡자가 그려놓은 악보대로 소리를 내는 데 그쳤던 이전의 기능인은 협주곡의 시대에 명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연주자들은 소네트에 적힌 문학적 감성을 연주로 표현해 내고, 소리를 궁극의 경지로 끌어올려야 하는 비발디의 까다로운 곡 때문에 고통스러웠겠지만, 오늘날 연주자와 음악인들, 심지어 콘서트를 자주 여는 아이돌 그룹들도 ‘음악 기능인’이 아닌 ‘예술인’이란 칭호를 듣게 되었으니, 비발디와 선배 연주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비발디는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해 종종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빈이나 암스테르담에 가기도 했는데, 1740년 9월경 비발디는 제자이자 연인으로 의심받는(?) 지로 양과 함께 빈에 갔다고 전해집니다.
빈을 방문한 목적은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도착 직후인 10월 경 극장에서 오페라 상연을 기획하고 있을 무렵 카를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스트리아와 주변국들은 왕위 계승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카를 황제에 이어 유일한 혈육이자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전까지 카를 6세의 통치 아래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던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 등이 그녀의 계승에 반발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진 것이죠.
카를 황제가 죽자 빈은 전쟁의 위기 때문에 어수선해졌고, 오페라 상연도 실패하여 비발디는 재정적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비발디는 7월 28일 이름 모를 ‘염증’으로 길을 가다 쓰러져 갑작스럽고 초라하게 사망하고 말았죠.
당시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과 프로이센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녀의 남편이자 명목상 황제인 프란츠 1세는 한때 명예 궁정악장이었던 비발디의 장례에 보조금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고, 비발디는 타향에서 사망한 바로 그날 빈민병원의 공동묘지에 서둘러 매장됩니다. 장례식에 든 비용은 빈민 수준의 최저가였다고 전해지죠.
그 후 비발디의 무덤은 지금의 빈 공대(Wien University of Technology)가 세워질 무렵 묘지 터를 정비하면서 사라져 버려서 지금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비록 말년에 아쉽게 세상을 떠났고 묘지도 찾을 수 없지만, 비발디의 음악은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사계>를 비롯해 수많은 명곡들이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