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사랑해서 아프고, 가까워서 서러워라

매번 그곳에 갈 때마다 대강의 약속시간을 정하고 그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는, 이미 만날 장소인 자기 집 앞 주차장에서 담배를 물고 내가 올 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 매번 차를 대던 그 곳, 그 장소에 차를 주차하고 잠시 기다려 보지만 여전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전화를 취소시킨 터라 한국에서도 여전히 베트남에서 쓰던 전화를 꺼내 들고 바로 코앞에 있을 친구에게 국제 전화를 건다. 오늘 따라 주택가 골목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아무런 친구가 없을 것 같은 외톨이 동네 강아지가 낯선 이방인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전화선에 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내가 올라갈까?

지난 6개월 전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고통스런 항암치료 대신 집에서 가족들과 웃으며 지내다 갈란다 하며 버티고 있는 우리 친구 집을 찾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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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짜리 작은 건물의 맨 위층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집을 걸어 올라가는데 오늘은 유난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집이 이리 조용했던가? 한 때는 그 집 앞에 있는 여중학교 학생들이 건물 안에 몰려 들어 담배를 피우며 깔깔거리던 3층의 외진 복도 끝마저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왠지 새삼 외로워 보인다.

어두운 집안, 환자가 있는 집이라 어두운 것인지, 원래부터 어두웠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그냥 어두웠는지 알 수가 없다.

친구 부인의 안내를 받으며 억지 미소로 잠시 입가를 늘였다 놓고는 그 친구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먹지도 못한 터인지 피골이 앙상한 모습에 제일 아플 곳 같은 얇은 팔 위쪽에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누워있는 친구가, 나를 보자 잠시 외출 나간 영혼을 다시 부른 듯, 힘없이 풀린 눈에 아픈 미소가 잠시 스치듯 지나며 반가움을 표한다. 왈칵 눈물 쏟아질 것 같아 절로 어금니를 악문다.

한 시간쯤을 그와 함께 보내고, 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건물을 내려오다, 3층 외진 창가에 잠시 서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중학교 교정, 오늘이 일요일인가. 학생들의 모습은 안보이고 동네 야구단의 파이팅 소리가 메아리처럼 멀리서 들려온다.

우리는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묻는 것도 공허하고 대답도 허무했다. 그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기도를 올렸을 뿐이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잡은 손을 놓기 전에 뭔가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데, 그가 먼저 던진다.

 

건  강  해.

건강이 이리 무거웠던가?

뭔가 위안의 말을 남겨야 하는데, 눈앞에 죽음을 달아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떤 말이 위안이 되겠는가? 어떤 말을 남겨도 후회할 것 같아서, 애매한 어금니만 악물다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은 왜 이리 한산하던지,

… … … … … … …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 쪽 문이 열리는 법이니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말자고 마음을 달래보지만, 그와 함께 보낸 세월이 만들어 놓은 그 깊은 흔적은 여전히 손에 걸리고 눈에 뜨일텐데, 그려 추억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보여주도록 하자.

친구라는 제목을 가진 중국 가요가 있다. 한국의 안재욱이 한글로 번안해서 불러 큰 히트를 쳤던 노래다.

그 노래 가사 첫마디,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이 번역이 원문을 번역한 것인지 한글로 새롭게 작사한 것이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엉성한 단어만 골라내 만든 것 같은 그 첫 소절에 공감이 가서 자주 흥얼거리곤 하던 곡이다.

특별한 용무도 없이 전화를 해도 되고,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도 당연하고, 그렇게 찾아 온 사람을 바쁘다고 그냥 두고 떠나 버려도 섭섭할 수 없는 관계, 마주 앉아 있으면서 아무 대화도 없이 장 시간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어도 그 자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 뭔가 특별한 사연이나 내가 알고 있는 내밀한 스토리를 나와 같이 공유하지 못함이 안타까운 사람, 이런 사람을 친구라고 하는 모양이다.

괜스레 힘들 날 턱없이 전화해도 반가운 내 친구.

오늘 오후,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의사의 통고를 받았다는 얘기다. 결국 그게 마지막 방문이 되고 마는가?

그런데, 이 녀석이 알았나, 내가 지 얘기를 쓴다는 것을. 어제부터 자꾸 나타나더라니, 원래 예정된 글의 소재가 이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쓴다. 그리고 그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동시에 받는다. 이 무슨 좋은 일이라고 이리 장단까지 맞춰가며 돌아가는가?

잠시 떠나는 것도 아니고 /  다시는 못 보는 곳으로

아주 가는 길이라고요 / 그래요, 아주 잊지는 않을 테지요.

익숙하던 많은 것과 한 순간에 이별을 고해야 한다.

전화기 안에 기록된/ 그의 번호도/ 낯익은 목소리에/ 귀에 익은 대화도 이제는 다시 들려오지 않겠죠/ 그 친구 집 근처 풍경은/ 그저 추억의

장소로 남을 테고/ 별일 없어? 하며/ 아침마다 딸꾹질 소리 같은 신호와 함께 도착하던 카톡의 사진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겠죠.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내 삶의 한 부분이 이제 호흡을 멈춘 채 그가 남긴 추억만을 담아두고 시간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가보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떠났을 때, 너만은 나를 찾아줄 것 같던 내 친구였는데, 이제는 누가 나를 찾아 주려나.

 

이런 일을 겪으면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생명체로서의 한계도 안타깝지만, 더욱 서러운 것은 인간이 아무리 가까워도 결국 생물학적으로 타인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사랑하는 이의 육체적 고통은 한 올도 덜어주지 못하는 것인가요?

 

사랑해서 아프고, 가까워서 오히려 서러울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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