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이사를 하게 됩니다. 처음 왔을 때에는 뭣도 모르고 집을 옮겨 다니는 것이 재미있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계약이 길면 이 년, 짧으면 일 년 주기로 이사를 자꾸 하다 보니, 이제 집 보러 다니는 것도 귀찮고, 짐 싸는 것도 귀찮게 느껴집니다. 하도 이사를 다니다 보니 잘 안 쓰는 짐은 창고에 박스째로 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넣어놓기도 합니다. 내 집이 아닌 빌린 집이기에 못 하나 박는 것도 조심스럽고, 어떤 집은 참 깨끗해 보이는 새 아파트여서 멀쩡해 보이다가도, 막상 들어갔더니 이곳저곳에서 바퀴벌레가 튀어나와 일주일 내내 바퀴벌레를 잡아야 되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꽤 살만한 집을 구할 것인지 노하우도 많이 생겼고, 익숙해졌나 보다 하고 자신만만해지려고 하면 집주인을 잘못 만나서 디포짓 금액을 날리기도 하며 안정적으로 보이면서도 순탄하지만은 않은 베트남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하도 이사를 다니다 보니 첫 번째 집은 푸년군, 두 번째 집은 떤빈군, 세 번째 집은 꽁호아길 옆, 이런 식으로 위치나 길 이름, 집의 외향 모습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상세한 집의 구조나 세세한 부분들은 대부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적어도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정도씩 살았던 공간인데도요. 그런데 제가 이사를 했던 여러 집들 중 다섯 번째 집은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바로 제가 그린 이 그림 ‘나의 집’ 덕분입니다. 제 방부터 시작해서 화장실, 안방, 거실을 지나 신발장이 있는 현관까지 그때 살았던 집을 3m가 넘는 캔버스에 펼쳐서 그려놓아서 희미해지려는 기억을 살릴 수 있게 돕고 있습니다.
오늘 칼럼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실내 풍경을 아름다운 색들로 표현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입니다. 지난 호의 주인공인 ‘에두아르 뷔야르(1868~1940)’ 와 오늘의 주인공인 ‘피에르 보나르(1867~1947)’ 의 작품을 가끔 헷갈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살 차이 났던 두 화가는 ‘나비파’ 의 양대 산맥이 됩니다. ‘나비파’의 나비는 날아다니는 나비가 아닌 ‘예언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보나르는 작업을 할 때에 기억에, 그리고 색채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보였던 색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색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보나르의 꿈속 혹은 기억 속을 엿보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모든 주제를 손안에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리기 전에 다시 생각하며, 꿈을 꾼다”
그럼 이제 보나르의 그림을 볼까요? 그의 그림을 보면 보나르가 즐겨 그렸던 실내 풍경 속에 항상 등장하는 모델이 있습니다. 그에게 창작 영감을 듬뿍 솟아나게 한 그녀, 보나르의 뮤즈, 그의 아내 ‘마르트 드 멜리니’입니다. 그들은 결혼에 구속되지 않고 30년 동안 같이 산 이후에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보나르는 ‘마리아 부르쟁’이라는 그녀의 본명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질만큼 그녀는 비밀스럽게 자신을 감추곤 했습니다.
그림 속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그녀는 결벽증이 있어 항상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항상 집에 있고, 목욕도 오래 하는 그녀이기에 보통 평범한 남자라면 짜증 날법도 한데, 보나르의 작품 속에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작품 384점 속에 그려 넣었겠죠?
보나르의 그림을 보며 혼자 또 상상해봅니다.
‘항상 자신을 감추고 타인과의 교감도 원치 않았던 그녀를 이렇게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지금 편안할까?’ ‘그래도 아마 편안하겠지? 자신의 욕조에, 자신의 집에, 그리고 따뜻한 보나르의 시선 속에 있으니까.’ ‘아니야. 자신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세상에 공개했다고 보나르를 흘겨보고 있을지도 몰라’ ‘이도 저도 신경 안 쓰고 열심히 목욕 중일 지도 모르지.’
만만치 않은 외국 생활을 하면서 ‘집’이라는 공간을 생각해 봅니다. 집은 전쟁 같은 힘든 하루를 보내도 마지막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늘 돌아갈 곳, 돌아갈 시간을 정해 놓고 사는 베트남의 녹녹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사는 동안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집, 공간’을 만들기 원하면서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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