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 마디 마디가 바늘로 찌르듯 아팠지만 기침은 없었다. 열은 밤새도록 있었지만 몸은 시리도록 추웠고, 침을 넘길 때 목젖이 아팠다. 통역에게 카툭으로 “열이 있음, 기침 없음, 온몸이 아픔” 이란 단어를 SOS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말이 없는 짧은 베트남 말이 카툭에 적혀 왔다. 그리고 카툭에 적혀있는 암호를 약국 안쪽에 서 있는 젊은 처자에게 보여주고 받은 약을 먹고, 하루의 낮과 밤이 다 가도록 더러 누워 있었다.
밥 먹지 않은 약 때문에 새벽에 속이 쓰렸고, 식은땀은 새벽까지 이불을 적셨다. 어제 낮에 헬스를 조금 심하게 했고, 토요일이라 약간의 술과 최근의 스트레스를 바꾼 것뿐인데 늙어 가고 있는 몸뚱어리가 이젠 이마저도 견디기가 싫은가 보다. 내 연식을 무시하고 몸뚱어리를 무리하게 굴릴 때, 몸을 그냥 놓아두라고 찾아오는 몸살 이리라.
아직도 열이 있고 기침이 없는 몸살과는 상관없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주위에서도 무리수들 때문에 교민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이 몸살 때문에 생겨난 기분 나쁜 독재의 망령들이 이곳 베트남 교민 사회에 유령처럼 돌아 다니는 듯하여 억누를 수 없는 두려움과 주체할 수 없는 경계심을 가지게 된다.
세계 전쟁의 원형이며 총과 칼로서 반도를 점령하고, 우리의 주권마저 빼앗은 자들의 폐망 70년, 그리고 우리의 광복 70년을 맞은 2015년, 패망한 후손들이 힘을 길러 다시 전쟁으로 갈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제3국의 전쟁에도 개입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는 무리한 만행에도 나름대로는 “자국 국민의 보호”라는 핑계를 가지고 주변을 선동한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통일주체 국민회의란 듣도 보도 못한 단체를 만들어 대선을 체육관선거로 만든 전직 대통령도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선거로 국력을 소모를 할 수 없다”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였다. 누구에게 유리하든 어떠한 논리이든 상관없이 선거제도를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발상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것은 본국의 헌법 제1조 1항이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베트남의 헌법 내용 중에 있다. 어떤 논리로 어떤 제도를 채택하든 교민의 합의하에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와 타당성과는 상관없이 언로와 건전한 토론을 억압하고, 차단한 상태에서 특정인들이 어물쩍 결정할 문제가 아닌듯싶다.
참고로 십몇 년 전 내 아들의 초딩 시절 딱 한 번 부반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마 반 전체의 선거로 부반장이 된 기억이 난다. 내 고향이 있는 경북 고령군 고령읍 외 2동은, 외딴 가구까지 합쳐도 70가구 밖에는 되지 않지만, 동내 구장만큼은 전 동민의 직접 선거로 뽑는다. 그래서 올해는 지난해 부녀회장을 지낸 친구 동영이의 부인이 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동영이에게 들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 동문회의 회원은 4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의 손으로 뽑은 회장이 있기에 동문 모두는 동문회의 전통성을 지금의 모임에 부여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일부가 모인 자리에서 아무런 정보의 공유 없이 동문회장을 추대했다면 베트남에 우리 대학의 동문회는 몇 개가 될지 알 수 가 없다. 왜냐하면 동문회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그 모임의 회장도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호회와 한 개의 봉사단체에 가입되어 있지만 어느 한 곳도 내 인생에 중요한 비중을 두진 않는다.
왜냐하면 동문회도, 봉사회도, 동호회도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가입을 할 수가 있고 누구나 회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권력을 가지는 이권 단체가 아니고, 어떤 기관에서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그것의 회장단은 그 동문회를 또는 그 동호회를 절대로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 모임의 회장단의 행위는 봉사가 아니라 통치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문회나 동호회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교민을 대표한다는 단체를 동호회보다 못한 모임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하는 말이다.
동네 구장이나 초딩의 반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교민을 대표한다라는 단체의 회장을 동내 구장이나 한국 국제 학교 초등부 학급반장의 정통성보다 못한 회장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리하면 교민 사회가 심하게 몸살을 하겠지만, 내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 베트남에서 아직도 두 개의 동문회와 동호회 그리고 봉사 단체 같은 것에만 가입하고 있을 뿐이고 그곳에만 회비를 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교민 사회가 몸살을 하든 식은땀으로 베트남을 적시든 상관없이 칼럼이나 쓰면서 해보는 말이다.
베트남에서 제 2의 인생 ep.2
김사장이 3일 동안 베트남에 있으면서 가지고 간 것은 오토바이가 많았다는 기억밖에는 없었다. 한국의 중형차 만큼이나 자주 볼 수 있는 벤츠의 화려한 삶들과 그 도로 위에서 새까맣게 탄 아기와 함께 음식을 팔고 있는 남루한 삶들이 조화롭지는 않았지만 밤늦게 찾은 가라오케의 젊은 아가씨가 40대 후반이나 된 자기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고는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낮에 보게 된 심각한 삶들은 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지 않았다.
김사장이 한국에서 잘나가는 직장을 퇴직한 것도 벌써 5년 넘었다. 금융위기 때 그의 은행은 다른 은행에 인수를 당했고 인수 이후 그의 지점은 폐쇄되었다. 인수를 주도한 은행의 외곽 지점에 잠시 근무를 하였지만 인수한 은행에서 오래 하도록 놓아두지 않았기에 은행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은행 생활 20년 가까이 번호표를 손에 들고 오는 손님과 마주 않아 통장을 확인하거나 카드를 권유한 것이 업무의 전부였지만 한때는 카드판매 전국 1위도 한 경험이 있기에 퇴직 후 그는 장점을 살려 정수기를 판매한 적도 있었고 은행에서 취급하는 보험을 지인에게 판 적도 있었다. 그는 퇴직 초기에 주식통장에 넣어놓은 퇴직위로금을 굴린 돈과 정수기를 판 수수료 등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둘이나 되는 그의 가정소비력을 따라가지 못했기에 그의 주식 통장 원금은 그가 퇴직생활을 하는 만큼이나 야금 야금 줄어 갔다. 그래도 그가 5년 전 회사 동료와 3박 4일 정도 여행한 적 밖에 없는 베트남에서 제2의 인생을 보낼 것이라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