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대통령의 예전 인터뷰가 새삼 화제로 떠올랐다.
박 대통령이 즐겨보는 TV 프로가 동물의 왕국인데 그 이유가 동물은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이다.
사실 박 대통령이 말한, 동물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보다 훨씬 더, 힘에 의한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용하며 우리 인간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 윤리적인 배신이 횡행한다.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는 살모사(비록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 해도)나 바퀴벌레의 몸 속에서 자라며 바퀴벌레의 내장을 파먹고 자라는 말벌, 짝짓기를 마친 사마귀나 거미의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등, 동물의 세계에서는 더욱 잔인하고 냉혹한 배신이 생존을 이유로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난다.
힘센 수컷의 사자가 암컷이 사냥한 먹이를 먼저 먹으며 더욱 강해져 무리를 지배하고 보호하기도 하지만 결국 시간이 가고 약해지면 그 역시 하이에나의 밥이 될 뿐이다. 그런 늙은 수사자를 지켜주는 동료는 없다.
그것이 동물의 세계다. 아마도 박통은 동물의 이런 행위를 그저 자연현상으로 쿨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무튼, 동물의 세계에서는 생존을 이유로 배신이 일어난다면, 인간의 배신은 좀더 다양한 이유로 생겨나는 듯하다.
인간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 명예, 사랑 등, 사회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부가적 가치를 이유로 배신이 일어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재확인 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배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이 자연에 속하는 동물의 한 종(種)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배신 역시, 당연한 자연의 일부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배신? 국어사전에서 배신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림” 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 이브가 자신의 주인인 하나님의 당부를 저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역시 배신이라고 본다면, 결국 인간의 역사는 배신으로 시작된 셈이다. 예수마저 유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보면 배신은 인류의 역사를 이끄는 수단의 하나인 모양이다.
절친한 친구인 부르터스의 일당의 칼에 찔려 죽은 시저가 대표적인 정치 배신의 희생자일 수 있겠지만 인간의 배신은 정치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방위적으로 어디를 가릴 곳도 없이 모든 면에서 횡행한다. 박통도 이번 기회로 배신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을 털어내고 그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조금은 일탈된 행동이지만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현실감을 가지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배신의 역사 속에서 살면서도 정작 자신이 배신을 당한 당사자가 되면 적잖은 당황이 밀려오면서 치밀어 오르는 울분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분노에 눌려 잠도 못 이루며, 이제는 그저 회한으로만 남는, 그간의 세월에 쏟았던 정, 시간, 추억 등이 떠오르며, 멍청한 자신을 책망하고 울분을 터트린다.
그러나 원래 이별은 항상 예상보다 빨리 오는 법이다. 혹시 예상 못한 이별을 배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심사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자신이 타인에게 뭔가 베풀었다는, 요즘 말로 갑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결국 배신을 당했다는 울분은 대부분 남보다 더 가진 자, 뭔가를 남에게 베풀었다고 자각하는 자의 일방적 감정일 수도 있다. 베푼 것이 없다면 배신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배신을 당했다는 것조차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위로할 만도 하다.
이렇게 좀 어설픈 논리를 내세워 마음을 정리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진짜 문제는, 세상일이 그리 단순하게 마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두 사람 만 살다가 일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결국 그 일로 인해 줄줄이 또 다른 우환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배신을 당했다는 억울함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의심을 낳게 하고 그런 의심은 주변의 모든 이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가고 그 화살은 부메랑처럼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며 우환은 줄줄이 꼬리를 물며 문제를 확대시킬 것이다.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마음이 피폐해지고 판단도 흐려진다. 마치 세상 모든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이 힘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가, 준비한 비수를 한꺼번에 내미는 것처럼 느껴지며 이를 악물게 만든다. 악문 이는 이빨에만 고통을 주지 않고 여기 저기 아픈 곳을 만들어 낸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영향을 받는 게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진단도 나오지 않는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서러움에 고독이 덤으로 스며든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닌 영혼이 빠진 상태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그래, 이제는 독해져야 해, 앞으로는 주제넘게 남에게 뭔가를 베푼다는 생각조차 하지마” 하며 세상 모든 이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이런 경험도 경륜이 쌓이다 보면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결국은 한가지다.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배신의 상처로 마음이 황폐해져 폐인이 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성자 노릇을 해야 한다.
“배반당하는 자는 상처받지만 배반자는 더 비참한 상태에 놓인다” 셰익스피어의 문구를 되뇌이며 마음을 씻어낸다. 그리고 21세기 리더 100인의 하나로 선정된 김진애 박사의 글에서 나오듯이, 오히려 그런 날을 기념일로 삼아보는 거다.
생애 최악의 날,
더 워스트 메머리얼 데이 (The Worst Memorial Day),
생일을 기념하듯 배신 당한 날을 기념하며 스스로 그 환난을 극복했음을 축하해 보자는 것이다.
노모가 직접 붓 글씨로 써서 벽에 걸어둔 성구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로마서 5 : 3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