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以德報怨 이덕보원

베트남을 방문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의문, 베트남이 어떻게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고 세계 최강국을 이땅에서 몰아냈을까?
베트남 호찌민에서 수년째 지내는 한 유럽친구는, 베트남인들의 긴장 풀린 생활 태도를 보면 과연 이들이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는지 세월이 갈수록 의문부호만 더 커질 뿐, 해답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며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 해답을 찾으려면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먼저 구찌 터널을 가봐야 한다.
베트남 전 당시 북 베트남군은 남 베트남에 자신들의 대규모 비밀 조직을 만들고 남쪽 정부의 정보와 모든 기밀을 동시에 취득할 정도로 막강한 조직력을 가진 남부 지원군을 만들었다. 그 남부 조직은 한마음이 되어 베트남인의 작은 체구만 들어갈 만한 땅굴을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200여 KM를 파고 지내면서 15년의 전쟁을 치르고 결국 원하는 승리를 얻었다.
베트남 전의 승리를 이해할 만한 또 한가지 방법은 하노이에서 하노이 사람들과 한 두어 달만 지내보는 것이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아 그렇지, 미군을 몰아낸 것은 남쪽이 아니라 북부 베트남이구나’ 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베트남이 존경스러운 것은 열악한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 이후에 보여준 베트남의 행보야말로 우리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미국에게는 그 전쟁이 계륵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먹어봐야 본전이지만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전쟁,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상대를 너무 몰랐다. 자신들의 진지 코앞에서 땅굴을 파고 대항하는, 전선없는 전쟁의 깊은 수렁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차에 미국 국내에서 전쟁에 대한 무용론이 일며 데모가 심해지자 정치적인 이유를 대며 슬그머니 후퇴를 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이 무려 150만명이 죽은 끔찍한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와 제초제 등 화학무기의 흔적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자손에게 이어가는 끔찍한 재앙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는 미국이나 미국과 협조하여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에게 보상은 커녕 사과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베트남의 태도는 국민의 감정적 정서가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발상이다. 이런 진보적 태도는 국제 외교에서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뭔가 미안해 하는 상대에게 사과조차 요구하지 않으며 미소로 만나니 상대는 계속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의 국가 외교적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실질적 소득은 누가 가져가겠는가?

1941년 일본이 베트남에 진출한 이후 일본은 전쟁 군량미를 베트남에서 무자비하게 조달해가는 바람에 일년 삼모작이 가능한 베트남에서 1944 – 1945년 일년사이에 무려 200만명의 아사(굶어 죽다)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후 베트남이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베트남의 가장 가까운 이웃의 하나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물론이고 프랑스나 미군에게조차 사과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임해 1995년에는 미국과 수교를 하고 2005년에는 전후 최초의 정상회담을 했다. 전시에 실종된 미군의 유해작업을 도와주고, 요즘은 경제적 교류를 넘어서 군사적 협력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지난 6월 1일에는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미방위협력강화 양해각서’ 라는 문서에 서명하며 방위협력을 강화했다고 발표했다. 요즘 눈덩이처럼 세력을 불리는 제 3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현대판 오월동주가 펄쳐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의 투자도 늘어가고, 매년 베트남을 방문하는 미국인 관광객이 10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양국의 동행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 듯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지향하는 다른 문화와는 달리 유교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서 나오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의 외교술을 이렇게 보여주었다. 이덕보원(以德報怨), 그 원문을 한번 살펴보자.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혹왈 이덕보원 하여 자왈 하이보덕 이직보원 이덕보원이라.

논어, 헌문 제 36장


어떤 사람이 말했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덕을 갚겠는가? 원한은 직량(直諒 : 정직하고 성실함)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하느니라.”

원한이 있다면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객관적으로 판단한 다음, 정직하고 엄정한 자세로 하나씩 풀어가며 매듭을 지으라는 얘기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다면 반드시 그에 대응할 만한 덕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공자님의 말씀은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초인적 방안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감정에 약한 인간들에게는 이 조차 말처럼 실행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공자의 조언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덕보원의 외교술을 보여주며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유사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온 인간 사회의 다툼과 갈등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들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같은 유교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국 군인 60만을 이름도 모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보내 3만 7천여명을 젊은 목숨을 던져가며 우리에게 덕을 베푼 미국에 대하여 일부 인사들은 오히려 그들을 우리의 주적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존망이 달린 사안에 목숨을 마다않고 손을 잡아 준 이웃에게 이덕보원의 차원은 아니라도 덕은 덕으로 갚는 이덕보덕은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사상에 관계없이 어떤 이유로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역사를 부인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두는 것이 공자님이 말씀하신 덕이 아니던가?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일본과의 관계 역시, 우리가 그들에게 문화를 전해준 형님의 나라라는 위치에서 그들의 행적에 대하여 이제는 그만, 감정은 접어두고 그들이 예상도 못하는 덕으로 갚아주는 것은 어떠한가? 우리도 상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않는 송구함을 심어주고 외교적 실리를 챙기자는 얘기다. 절대로 사과할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진정한 반성을 요구하며 양 국민간의 정서적 마찰을 감수하는 우리의 외교는 너무 유아적이지 않은가?
이제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역사의 매듭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우리 가슴에 피멍처럼 응어진 한은 후손에 남기지 말고 우리세대 만의 것으로 감당해 보는 것은 어떠할진가?

작성자 : 한 영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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