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나의 화가 IV – 이인성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 “누구냐.” “지나가던 취객이요.” “뭐라구. 지금이 무슨 시간인데 장난하려 들어. 누구야.”
“취객이요. 술 취한 취객이요.” 사내는 껄껄 웃어 제낀다.
…….
치안대원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지. 정지. 누구야.”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나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뭐라구?”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혹시 고위층의 인물인가 행여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 준다. 그러나 그 치안대원은 좀처럼 치밀던 화가 풀리지 아니한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알지.”앉아서 사무 근무를 하던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좀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은 옷도 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사내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온다. “더러운 쌔끼.”
가슴에 품었던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 나온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탕!”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최인호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중에서 발췌
한국일보 1974년 6월 5일(젊은이 세계)

이글을 처음 읽었을 때 올라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서요. 저 시대, 저 치안대원에게는 왜 총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을 이렇게도 어이 없게 죽였는지 하고요. 그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정말 천재 맞는데.

다소 우울한 글로 칼럼을 시작하고야 말았네요. 어쨌든 소개합니다. 언제나 이름 앞에 ‘천재 화가’ 라고 수식어가 붙었다는 오늘의 주인공 ‘이인성’ 화가입니다.

이인성 화가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타고난 재능은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세계아동작품전에서 입상을 시작하여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을 하게 됩니다. 그의 활발한 활동과 뛰어난 재능은 후원자 눈에 띄게 되어 일본에서 일본 유학 기회를 얻고, 일본에서 오전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학교에 다니는 녹록치 않은 생활을 하면서도 조선미전 수상은 물론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수상하며 일본 현지에서도 ‘조선의 천재 소년’ ‘조선 화단의 귀재’ 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의 수상 기록은 멈출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가 활동한 16년 동안 30 여점의 입선과 특선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스물셋에는 최고상인 창덕궁상 수상, 그리고 당시 내노라하는 화가도 마흔 안팎에 들 수 있던 추천 작가 반열에도 스물 다섯에 최연소로 등극하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럼 이제 그의 그림을 볼까요?
많은 분들이 이인성 화가 하면 ‘가을 어느 날’ 이라는 작품을 맨 먼저 떠올리지만 저는 이 작품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바로 그가 그의 첫 딸을 그린 작품 ‘애향’ 입니다. 이번 칼럼을 쓰다 보니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제가 소녀를 그린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화가 시리즈’ 에서 소개시켜드렸던 그림들의 대부분이 소녀들을 주제로 그린 작품들이었습니다.(나의 화가들 : 벨라스케스, 로트레크, 메리 카사트)
특히 이 그림은 큰 눈에 코가 오똑한 예쁜 외국 소녀들이 아닌 전형적인 한국적인 얼굴의 소녀가 있어서 더 눈길이 가고 조화롭게 느껴집니다. 그림 속 소녀에게서 풍겨지는 고집있어 보이면서도 마음이 여려 보이는 분위기 또한 마음에 쏙 듭니다.

다음 그림은 ‘해당화’ 입니다. 한국적인 여인과 소녀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밝음 속에 어두움이 담겨 있습니다. 해당화가 피어있는 봄이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겨울처럼 꽁꽁 싸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과 곧 찾아올 광복이라는 희망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이 그림이 가진 힘에 압도당했습니다. ‘이렇게 잘 그릴 수 있다니’ 하구요. 찬찬히 뜯어봐도 그림에 쓰인 색이며 구성, 숨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드러낸 것 같은 그림 속 의미들 모두 대단하지만 한번에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이 그림을 그린 그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며 재미있었던 점은 머리 속에 자꾸 ‘어딘가 참 고갱 그림 같다.’ 는 생각이 든 점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조선의 고갱’, ‘한국의 고갱’ 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가을 어느 날’ 과 ‘경주의 산곡에서’ 등의 작품에서는 후기 인상주의 느낌이 풍기면서도 한국적인 느낌도 물씬 풍겨옵니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경험했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의 화풍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단 한국적인 토속성과 결합시켜서 표현했습니다. ‘경주의 산곡에서’는 그에게 조선미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안겨주었고, 1998년 평론가들이 선정한 “한국근대유화베스트 10”에서 1위로 뽑히기도 했답니다.

어떤 화가에게는 뒤늦게 미술 활동을 시작할 그런 나이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인성 화가.

역사에 만약이 있을 수 없다지만 아쉬움에 자꾸자꾸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조금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구요.
그와 동시대 작가인 박수근, 이중섭이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한국 전쟁으로 어수선할 시기에 일찍 세상을 떠나 제대로 된 평가도 없이 잊혀진 화가가 된 그. 또 혼자 상상해봅니다.
만약 그 으스대기 바빴던 다혈질의 치안 대원이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요. 그 시대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미술을 부유층의 전유물로 생각하거나 예술가를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미술에 대한 편견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고, 한 분이라도 더 한국의 천재 화가 ‘이인성’을 기억하기 바라며 오늘의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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