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섬나라로 대륙과 격리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베트남과 한국은 그 영토가 중국과 접해 있어 중국문화를 수용하기에 유리한 여건에 있었다. 한편 양국은 중국의 압박으로부터 늘 자신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되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다행히 지리적으로 워낙 멀어 서로 침략할 위험이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후예화산 李씨
양국의 관계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26년 리(Lý, 李) 왕조의 6대 황제 영종의 아들 이용상(Lý Long Tường) 왕자 권신 쩐(Trần, 陳)씨가 왕위를 찬탈하자 일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창진도에 도착한다.
이후 그는 고려 고종 때 황해도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으로 봉작을 받고 한국 화산(Hoa Sơn)이씨의 시조가 된다.
또한 리 왕조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5대 황제 신종 이양환의 아우인 이양혼(李陽焜)도 1127년 고려로 망명하여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된 바 있으며, 특히 최근 고려 무신정권기에 집권한 이의민(Lý Nghĩa Mân)이 귀화한 베트남 리(Ly) 왕족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
(리 왕조의 후예는 현재 총 3,600명으로 추정됨)
참고로 지난 2010년 하노이 천도 1천년 기념행사에 리 왕조의 후손(Lý Xương Căn)이 참석하여 화제가 된 바 있으며, 당시 그를 소재로 한 소설 ‘황족 이용상’이 출판되기도 했다.
한편 당시 대유학자 막딘찌(Mạc Đĩnh Chi, 莫挺之, 1293~1324)가 원나라에서 사귄 고려 사신의 초청을 받고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베트남과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동시 합격한 수재로, 원나라에서 시와 필담으로 고려 사신들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추적이 편찬한 명심보감이 13~4세기경 베트남에 전래되었는데, 당시 ‘밍떰바오지암(MINH TÂM BÀO GIÁM)’이란 제목의 현대 베트남어 번역본이 유학자들 사이에 읽히기 시작했다.
레왕조, 조선왕조
베트남의 후기 레왕조와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므로 양국 사신은 중국에서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조선의 사신은 베트남 사신에게서 직접 들은 베트남의 풍속, 지리, 학술, 제도 등에 대해 기록하거나 한문으로 시를 지어서 서로 주고받았다. 특히 서거정, 홍귀달, 조신, 김세필, 김안국 등이 베트남 사신과 화답한 시가 유명한데 이 시들은 베트남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담고 있으며 서거정의 다음 시가 이 점을 특히 잘 보여준다.
사해가 모두 형제니
담소하는 곳이 곧 나의 고향.
새로 알게 된 즐거움 기뻐했거늘
긴 이별의 슬픔 어이 견디랴.
훗날 남과 북에서 서로 그리워할 때
구름과 물, 참으로 아득하겠지.
弟兄均四海, 談笑卽吾鄕.
已喜新知樂, 那堪別恨長.
他年南北思, 雲水正茫茫.
한편 조선전기의 대미를 장식한 사람은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자신이 지은 시와 베트남 사신이 지은 시, 그리고 베트남 사신 풍칵코안(Phùng Khắc Khoan)과 주고받은 문답을 모아 ‘안남국사신창화문록’이라는 책을 엮었다. 이 책에는 오늘날 베트남의 왕실, 풍속, 제도, 기후, 국토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베트남 붐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지식인 사회에 베트남에 대한 관심과 우호의 감정을 확산시켰다. 이처럼 당시 조선과 베트남 지배층은 동아시아의 공동언어인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서로간에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조선 사신, 베트남 사신
조선 후기에도 조선 사신과 베트남 사신은 북경에서 만나 시를 주고받곤 하였다.
일례로 실학자 서호수는 1790년 중국에 파견된 외교사절에 부사의 신분으로 참여했는데, 귀국후 연행기를 저술했으며, 이 여행기 속에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또한 유득공은 서호수의 수행원으로 1796년 세집 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이 안에는 중국 문인들의 시 외에 일본, 베트남, 유구 문인의 시가 수십편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박제가도 중국 사신들과 시를 주고받았으며, 이덕무 역시 베트남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반면 베트남의 경우는 베트남의 대학자 레뀌돈(Lê Quý Đôn, 黎貴惇)이 1760년에서 1762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 사신 홍계희와 만나 시를 주고 받은 사실이 북사통록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에서 청에 파견한 사절단의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청의 정세와 동향을 조사해 국왕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가령 정조 12년 8월 12일 역관 홍명복이 올린 수본에는 ‘안남국에 임금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는 변란이 생겼다’ 등 베트남 정세가 대단히 신속하게 조선 국왕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베트남에 갔다온 사람들의 전언을 통해서도 베트남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있었다. 조완벽은 정유재란(1597)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일본 상선의 선원이 되어 베트남을 왕래하던 자로, 조완벽전에는 이전의 그 어떤 문헌에서도 볼 수 없었던 17세기 후반 호이안과 후에 일대 베트남의 문화풍속이 대단히 생생하고 풍부하게 재현되어 있다.
또한 조선 숙종때 제주도민 24명이 호이안 근처에 표착하였다가 당시 중남부 베트남 지배자인 윙가의 가주와 중국상인의 도움을 받아 1686년 21명이 생환한 바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일종의 ‘베트남 견문기’라 할 만한 기록들이 지식인들 사이에 유포되면서 베트남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이 한층 확대되어 갔다.
이밖에 개화기때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보면서 교훈을 삼곤 했는데, 1906년 현채가, 1907년에는 주시경과 이상익이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번역해서 출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