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통일 베트남 더 깊이 알기 (7)

통일 베트남 40년, 통일 베트남의 강력함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한반도 통일 담론에서 베트남은 우리의 선택적 모델이 될 수 없는가의 의문에서 출발하여 통일 베트남의 긍정적 가치를 살펴봄으로 베트남도 우리의 통일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통일 베트남 더 깊이 알기”를 통해 우리의 통일 의지가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통일이 없으면 한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통일을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을 바라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통일도 염원해 본다. 분단된 조국을 물려주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1976년 4월 25일, 베트남은 통일 이후 제 1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를 구성하였다. 통일 이후 개최된 첫 총선거와 국회, 이것은 통일 베트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통일 이후 첫 총선에 전 국민의 98.8%가 투표를 했다. 국회를 구성하고 그해 6월말부터 7월초까지 첫 통일 국회가 개최되었고, 국회에서 국가이름, 국기, 국가, 국호, 수도를 결정했다. 이어 그해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하노이에서 베트남 공산당 제 4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통일 이후 개최된 첫 전당대회이다. 당시 1,550,000명의 당원 중 대표자 1,008명이 참석하여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계획 경제

이때 정부 체제의 통합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경제를 통합해 나갔다. 경제 통합 정책은 한 마디로 ‘사회주의 계획 경제 정책으로의 전환과 전국화’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 계획 경제 정책을 도입, 실시하였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 정책의 핵심은 1) 토지 및 기업(생산수단)의 국유화 2) 집단 농장(생산방법의 집단화) 3) 배급제 실시(생필품) 4) 화폐개혁 등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방법을 통하여 사회주의 체제의 계획 경제를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계획 경제는 시장이 자유롭지 못했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다. 주민들은 비협조적이었으며, 생산량은 갈수록 줄었고, 절대빈곤의 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배급표를 받아 매일 아침 일정량의 생필품(쌀, 생선, 고기, 유류 등)을 줄을 서서 받아야 했다.

베트남이나 독일 모두 통일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로 인한 어려움이었고 독일은 동독을 부양해야하는데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베트남은 통일 후 10년간 절대빈곤을 탈피하지 못했고, 독일은 10년 후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분명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발생한다.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빠른 시간 내에 통일이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전환하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 한반도의 상황은 베트남과 독일과는 다르다. 준비된 통일과 통합은 남북의 경제적 강점을 잘 살려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전망할 수 있다. 베트남의 통일도 통일의지 만큼이나 실제적으로 준비된 통일이 아니었다. 그로인한 혼란이 있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갑작스레 올 수 있다. 철저히 준비된 통일은 혼란을 최소화하고 통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오히려 G2시대의 본격화와 다극체제의 시대에 그리고 중-일간 갈등 속에 동북아시아 3개국의 균형자 역할을 하며, 국제질서를 새롭게 하고 동북아시아 정세의 케스팅 보트를 쥘 수 있을 것이다.

개혁 개방

제 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결정하였다. 통일이 되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응우옌 반 린이 서기장으로 있던 1986-1990년은 개혁개방의 시작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 이후 10년 동안 계획 경제를 시행하다 보니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개방 시작기인 1986-1990년 동안 평균 3, 9%의 GDP가 성장했다. 베트남 경제의 결정적 변화는 1988년부터 시행된 농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농경지의 사유화’였다. 이 결과 1988년에 450,000톤의 쌀을 수입하던 베트남이 1989년에는 1백만 톤의 쌀을 수출했고, 1990년에는 1백 50만 톤을 수출함으로 세계 쌀 수출국 3위에 오르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1986년에는 774.7%이던 것이 1990년에는 67.4%로 내려 왔고, 2007년에는 12.6%가 되었다. 경제를 ‘정부가 결정하던 것에서 시장이 결정 한다’는 케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베트남식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서며 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게 된다.

2011년 세계 경제가 어려운 중에도 6%대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고, 해외 교포들의 송금액은 꾸준히 증가해 개혁개방 전에는 거의 없던 것이 1995년에는 3억 달러가 되었고, 2011년에는 90억 달러에 이르렀다. 1인당 GDP가 1,300 달러가 되었고, 구매력 GDP는 3,900 달러에 이르렀다. 국내총생산은 1,210억 달러를 달성했다.

2014년 12월 28일자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 쩨 (Tuổi trẻ) 신문 3면 머리기사에서 호찌민시 인민위원장은 호찌민시의 GDP가 연초 목표보다 초과 달성한 9.6% 성장하였으며, 호찌민시 1인당 연 평균 수입이 2013년의 4,545달러보다 12.89% 인상된 5,131 달러라고 발표했다.

세계화 시스템에 접속

세계화의 시스템에도 적극적으로 접속해서 1992년에 EU와 무역협정을 맺고, 1995년에 아세안의 회권국이 되었으며, 2002년에 WTO 가입 협상을 시작하여 2007년 1월에 정식 가입했다. 그리고 2014년에 한국과도 FTA를 체결하기로 했다.

2000년 클린턴 대통령이 종전 후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미국과 베트남의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종전 후 취해졌던 경제조치가 해제 되면서 북미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은 남북이 더욱 통합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고, 해외교포들과 통합하는 기회가 되었다. 더 나아가 세계를 받아들이고 소통하게 되었다.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중국이 급성장하며,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새롭게 성장 동력을 얻는 길은 통일이다. 통일은 한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얻도록 할 것이다. 통일은 중-일 사이에서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통일이 없는 한반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한반도 통일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다시 비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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