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실화만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없다. 일찍이 소설가 보르헤스는 실제 삶보다 더 허구적인 이야기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때로 어떤 삶은 어느 드라마보다 더 강력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패전을 이끈 세기의 천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실형을 언도받고, 마침내 41살의 나이로 자살하는 이야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앨런 튜링의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난 후 50여년 동안 가려져 있었다.
영화는 1951년 집 안에 강도가 든 한 남자가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기 집에 강도가 들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애매한 입장을 취한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판단한 형사는 그를 좀 더 파헤쳐 간다. 그가 바로 수학자 앨런 튜링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하는 앨런 튜링은 괴팍한 천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앨런 튜링의 괴벽을 실증적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 매우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튜링은 자신이 만든 기계를 크리스토퍼라고 명명하며 인격체처럼 대한다. 사실 크리스토퍼는 앨런 튜링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크리스토퍼 모컴의 이름이었다. 모컴은 외톨이었던 앨런의 유일한 친구였지만 그만 18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화는 이런 튜링의 트라우마들을 매끈한 서사구조 속에 녹여 제시한다. 이 같은 서사적 재미는 뻔한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에서도 빛을 발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결국 앨런 튜링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튜링은 갖가지 불신과 위협 앞에 휘청인다. 영화의 힘은 이 긴장감이 마침내 패배감으로 무너질 때 증폭된다. 전쟁이 끝나자 앨런 튜링의 복무 기록은 파기된다.
기밀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밀을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이 사라지면서 앨런 튜링의 과거도 함께 증발된다. 전쟁 영웅이 되는 대신 그는 당시의 법을 어긴 범법자가 된다. 강도짓을 했던 남자가 튜링의 동성 애인이었고, 그가 숨기고자 했던 게 바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었다.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후 그는 호르몬 치료를 선고받는다. 당시엔 에스트로겐과 여성호르몬을 주입하면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호르몬 치료로 인해 튜링은 극심한 우울증과 신체 변형에 시달렸다.
그는 마침내 “사회가 내게 여성을 요구하니 가장 순수한 여성이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사과에 청산가리를 주입해 한 입 베어 물곤 세상을 떠났다. 고작 41살의 나이였다. 만약 혼자만의 능력으로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앨런 튜링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인공지능의 완벽성을 파악하는 테스트를 튜링테스트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전히 튜링의 혜택 아래 살고 있는 셈이다. 유럽을 구했지만 유럽의 편견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남자, 그 아이러니가 훌륭한 배우들의 호연으로 재현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감독 : 모튼 틸덤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글 : 강유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