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September 27,Friday

북칼럼

– 예술같은 세계사책 –

세계사 책을 보다 비슷비슷한 이름들, 사건들 속에서 머리속이 꼬이며 졸음이 올때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5000년이란 인류의 역사 시대 속에서 400페이지 정도 되는 이 책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을 말이죠. 저 개인만 해도 학생때 쓴 일기, 회사다니며 매년 써온 업무용 다이어리만 모아놔도 책으로 10권 분량은 나올겁니다. 그 안에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아 부러웠던 친구도 있고, 운동을 잘해서 인기가 많았던 친구도 있고, 입담이 좋아 주변을 항상 즐겁게 해줬던 친구도 있습니다. 입담이 좋았던 한 친구는 개그맨이 되어서 지금도 신문기사나 방송을 통해 그 이름을 가끔씩 듣고 있습니다. 회사 다이어리에는 신입사원때 하늘처럼 높아보여 감히 먼저 말도 못걸었던 어떤 부장님, 너무나 일을 잘하는 것 같아 부러웠던 김** 대리님도 등장합니다. 18년전에 없는 돈이라도 끌어모아 늦기 전에 목동에 집을 사라고 했던 협력업체 김** 사장님도 등장(소위 말하는 재테크의 귀재셨습니다) 하고, 밴쳐기업에 창업멤버로 입사하여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첫번째 기업을 대기업에 팔고, 게임회사를 차렸다고 해서 좀 안스러워했는데 그회사가 넷마블이었습니다.) 끝에 지금은 대기업 CEO가 된 동네형 장** 형님도 등장합니다. 지금 제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보니 1,278개의 연락처가 있네요. 사회 생활을 하며 받은 명함을 모아놓은 10권이 넘는 명함첩에는 지금은 연락할 이유가 없는 많은 분들의 명함이 셀수도 없이 가득합니다. 그분들의 명함첩과 전화 번호부에 있는 제 이름과 명함 역시 같은 입장에 처해 있겠지요. 살면서 인연이라는 이유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나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의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충격적일 정도로 적습니다. 학창시절 반이 바뀔때마다 했던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을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인생을 절반정도 산 제가 만난 인연중에 100년후 세계사책에 나올만한 사람을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세계사 책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스스로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리 두꺼운 세계사 책이라도 결국은 ‘요점정리’에 불과합니다. 수능을 앞두고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구입했던 ‘지피지기’ 라는 요점정리 노트가 생각이 나네요. 친구들 사이에서 ‘지푸라기’라고 냉소적이지만 절박한 느낌의 별명으로 불렸던 그 요점정리 노트의 문제점은 너무 요점만 적어놓아 머리에 하나도 안들어 왔다는 것이었죠. 몸에 흡수가 전혀 안되는 불량 종합비타민 ABCDEFG 영양제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 문제집 살돈으로 양송이덮밥 몇그릇을 더 사먹을걸’ 이란 후회를 인생내내 하고 있습니다. 좋은 역사책이란 어떤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인물과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고, 역사라는 거대한 조각 맞추기 퍼즐판에서 큰 조각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조각들의 위치를 알게되면 독자들은 나머지 조각들의 위치를 스스로 찾아낼수 있는 힘과 자신감을 갖게 되죠. 역사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일상과 많이 떨어져 있다보니 사실 몰라도 사는데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읽다가 책을 덮는다 해도 독자의 잘못이나 손해라고 단정할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다만 롯데월드 입장했다가 회전목마 만타고 집에 가자고 하는 친구를 보는듯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특히 이책 곰브리치 세계사는 세계사의 디즈니랜드라 불릴수 있을 정도로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미술 입문서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의 저자이기도 한 곰브리치 아저씨는 정말 월드클래스 스토리 텔러입니다. 종이책 버전은 다양한 그림과 사진(예일대 특별판 기준 컬러도판 200여장 수록)으로 눈을 더욱 즐겁게 해주지만, 도판이 없는 전자책으로 보아도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루에 1챕터씩 40개 챕터에 이르는 이책을 6주동안 써서 완성했다는 곰브리치 아저씨는 전교 1등에 운동도 잘하고, 그림도 잘그리고, 입담까지 갖춘 넘사벽 친구같은 작가입니다. 성격까지 좋은듯해 부럽다 못해 질투까지 나네요.


이책은 ‘옛날 옛적’부터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선사시대에 2챕터를 할애하고, 이집트 문명부터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 로마제국, 중세 유럽, 도시의 탄생, 르네상스와 신대륙 발견(근대의 시작), 종교 개혁 및 종교 전쟁, 과학의 등장, 오스만 제국,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산업 혁명,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까지의 세계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판 출간년도가 1936년이고 오스트리아인(저자는 1936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나중에는 영국 국적을 갖게 됨)이었던 곰브리치는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 세계사 책을 썻습니다. 당시 예술사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곰브리치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 책을 기획했던 출판사의 요구에 맞춰 학술적 글쓰기 방법에서 벗어난 세계사 책을 쓰게 된것인데, 그게 결국 이처럼 멋진, 예술같은 세계사 책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터키어 번역본 머리글의 한구절은 세계사 입문서를 펴는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마법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나는 독자들이 필기를 하고 또 이름이나 연대를 외워야한다는 부담 없이 느슨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꼬치꼬치 질문을 하지 않으리란 점도 약속하겠다'”.

어린 딸아이에게 선물로 주기위해 출장오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산 책인데, 제가 먼저 읽어 버린 책입니다. 세계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야망은 버린지 오래지만, 지금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일들로 인해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었는지, 문명과 국가의 흥망성쇄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다 보면 조직과 개인의 흥망성쇄 또한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현재 나의 위치 또한 그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는 이름을 남긴 사람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책에 까맣게 인쇄된 글자 뒤에 있는 하얀색 여백속에 더 많은 개인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아왔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마치 내 전화기 주소록 안에 있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지인들이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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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 금강공업 영업팀장 / (전) 남양유업 대표사무소장 / 베트남 거주 17년차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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