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혁명의 음료 커피 이야기

 

아침 출근길에 커피잔을 하나 들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장면이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지요. 그런 장면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람객도 없습니다. 그만큼 커피는 현대인의 생활에 빠질 수 없는 음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쓴맛의 검은 물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을까요? 과연 커피가 어떻게 세계인의 음료로 등장하고, 왜 베트남이 커피의 주요 산지가 될 수 있었는지, 커피에 둘러싼 여러가지 여담을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아침 출근길에 커피잔을 하나 들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장면이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지요. 그런 장면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람객도 없습니다. 그만큼 커피는 현대인의 생활에 빠질 수 없는 음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쓴맛의 검은 물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을까요? 과연 커피가 어떻게 세계인의 음료로 등장하고, 왜 베트남이 커피의 주요 산지가 될 수 있었는지, 커피에 둘러싼 여러가지 여담을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목동이 발견한 우연의 산물
에티오피아에는 칼디스 커피라 불리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왜 국가적으로 칼디스라는 브랜드는 내세우면서 에티오피아는 장사를 할까요?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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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내의 이야기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염소를 치던 젊은 목동 ‘칼디’가 하루는 염소들을 데리고 좋은 목초지로 가던 중 염소 몇 마리가 이상한 열매를 먹고 잠도 안 자고 밤새 뛰어노는 걸 보고는 신기해서 먹어 보고는 각성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지역의 권력자인 수도승은 발견자인 칼디를 부르면서 그 열매를 몇 개 더 따오라는 말을 해주는 것으로 커피나무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커피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칼디의 전설을 유력하게 커피의 기원설로 보고 있습니다. 즉 칼디스 커피는 커피의 원조를 알려주는 에티오피아의 자랑이자, 그 나라의 역사를 알려주는 하나의 증표인 것입니다. 에티오피아가 현재 아프리카 최대의 아라비카 원두를 생산하는 커피 생산국이고, 또한 아라비카 품종도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커피는 각성효과로 인하여 널리 퍼지게 됐지만, 이러한 각성효과를 발견하여 음료수로 마시기 시작한 곳이 바로 에티오피아입니다.

커피라는 작물은 사실 본래 각성효과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아프리카산 체리라는 과일로 먹었을 음식입니다. 커피 체리(coffee cherry), 또는 커피 베리(coffee berry)라고 부르는데 아주 작은 체리나 버찌를 닮았습니다. 열매가 달리는 모양새는 앵두와도 비슷하고, 과일로도 먹을 수 있습니다. 맛도 새콤달콤하고요. 그렇지만 모양새만 비슷할 뿐 체리나 버찌, 앵두와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커피는 어떻게 세계로 퍼졌을까요?
유럽에서는 사실 16세기까지는 커피는 이단의 물이라고 칭하면서 금기시하던 식품이었습니다. 왜냐면 커피가 전세계로 퍼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이 바로 이슬람의 중흥이었기 때문이고, 커피가 당시 종교적인 이유로 백안시하던 아랍지역에서 나온 음료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슬람권에서 커피가 알려진 시점은 서기 9~10세기경이었습니다. 당시 아랍인/페르시아인들은 커피를 분춤(Bunchum)이라고 부르며, 약재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알 라지 같은 무슬림 의학자들이 커피가 정력을 감퇴 시킨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잘못된 상식은 4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커피의 전파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가 에티오피아의 홍해 건너편 예멘에서 14~15세기(고려말 조선 초 시기)에 이슬람 성직자들의 졸음 방지용으로 커피가 음용되면서 커피는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게 성직자들에 의해 커피가 공인되었고 널리 퍼지게 됩니다. 15세기 말, 예멘 북쪽의 이슬람 성지 메카로 전파된 커피는 예배를 드릴 때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음용되기 시작하고, 아울러 유목민들의 야간 이동용으로도 음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사는 사막은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소, 양이 뜯어먹을 풀이 찾아 이주하려고 하면, 해가 떠있을 때는 그늘 주변에 조용히 있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커피는 이슬람 유목민들에게 중요한 생존을 위한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 지역의 커피가 독한 방식으로 제공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이슬람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된 커피는 16세기 무렵, 이슬람 성원의 주변에 카흐베하네(kahvehane), 즉 커피하우스가 생겼는데, 알콜을 금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카흐베하네는 여러 의견이 오가는 장소로 활용이 됩니다. 이러면서 카흐베하네가 반체제 세력의 회동 장소가 될 것으로 우려한 메카의 시장 감찰관 카이르 베이의 카흐베하네 폐쇄 제안이 있었고(일명 ‘메카 사건’) 이후 그는 주군인 이집트의 술탄에게 커피를 불순한 음료라면서 유통 금지를 의뢰하였는데 커피를 마셔본 술탄은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유용한 대체음료가 될 수 있고, 각성작용이 경건함을 일깨운다며 오히려 커피를 장려하면서 아랍세계를 넘어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려진 커피의 가치에 대한 정의에 관계없이 커피하우스인 카흐베하네는 계속 탄압합니다. 그 이유는 정치 공작의 장소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투쟁과는 무관하게 커피 문화는 서민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권 대부분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각지에 퍼져 나가게 되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정복하면서 이들의 지배를 받던 유럽지역에서도 커피가 슬슬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혁명혁명의 밑걸음이 된 세기의 음료
유럽인의 커피에 대한 첫 기록은 1573년 독일의 학자 레온하르트 라이발프가 레반트(시리아-팔레스타인)를 여행하고 남긴 동방여행기(1582년 저술)에서 현지인들이 ‘카우베'(chauwe) 라는 음료를 마신다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커피가 이슬람 세력을 통해 알려지다 보니, 기독교권 영역인 유럽에서는 커피를 ‘이교도들이 마시는 음료’로 규정하며 기피했습니다.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 악마의 유혹, 야만인의 음료, 사악한 나무의 검은 썩은 물 등으로 폄하하면서 마시지 말라고 권장했지만, 한번 커피의 맛을 본 사람들은 계속 빠져들었습니다.
현대 카페의 원형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처음 생겼습니다. 100년뒤 약17세기 무렵에는 이스탄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됐는데, 특히 17세기 오스만 제국에선 특권 계급인 예니체리(친위군대)와 황태후 등 하렘이 무능한 술탄 대신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이들과 결탁하여 사치와 부패를 이어가던 세력이 바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카페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오스만 사절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1665년 빈에 당도한 오스만 사절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고 공방전 4년 전엔 1685년에 이미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빈에 카페를 열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선 그보다 앞선 1652년 아르메니아인 파스카 로제가 런던에 오픈한 커피하우스가 대성공하고, 1680년대 당시 런던 인구는 50만이었는데 커피하우스는 3천 곳이 있었다고 하니, 그 유행이 당시 사회 수준에 비하여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유럽에 퍼진 카페(커피하우스)는 영국에서는 정치, 과학 등 의견을 교류하는 장소로 애용됐습니다. 당시 정치, 학문적 토론이 벌어지던 커피하우스에는 입장료 1페니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기에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 외에 단순히 수준 높은 대화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인맥 쌓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런던의 주식 거래소 주변의 커피하우스에선 주식 상담이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상담을 받자 거래소 자체는 한산해질 정도였습니다. 무역상들이 모이던 커피하우스에선 고객 유치를 시도하던 중개상들이 위험 부담을 미끼로 하며 보험의 시초가 마련되기도 하였고, 토리당과 휘그당 같은 정당들도 각각 선정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규합했을 정도입니다.

영국의 커피 사랑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1672년, 쉴레이만 아아의 방문 후 7년이 지난 파리에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이 개업한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 후 파리지앵들은 카페를 애용하였고, 프랑스어였던 카페는 곧 국제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지칭하게 됐습니다. 1686년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카페 프로코프가 개업하여 중산층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한데 모여 백과전서 편집 회의를 개최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초엽 인구 50만인 파리에는 카페 3백여 곳이 있었고,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엔 60만 인구에 카페는 1,800개에 이르렀을 정도로 커피와 카페의 인기는 정점에 달합니다.

프랑스 혁명도 어떻게 보면 커피의 위력으로 일으킨 것이라고도 진단이 가능합니다. 폐쇄적인 귀족들의 사교 문화인 살롱과는 달리 카페는 지식인 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드나들 수 있는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지닌 지라,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개혁의식을 키워 간 부르주아의 이론들이 혁명의 기폭제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 주요 문벌 귀족이었던 오클레앙 공이 운영했던 ‘카페 드 라 레장스’는 경찰의 출입을 제한하여 각종 사상가들의 자유로운 의견 교환에 힘썼을 정도입니다.

1789년 7월 12일, 자코뱅 클럽에 속한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Aux Armes Citroyen!” 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카뮤 데물랭이 민중에게 무장 봉기를 연설한 곳이 바로 오를레앙 공의 저택인 팔레 루아얄에 속한 카페 드 포 에였습니다. 위 연설이 있고 약 이틀 후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세계의 역사는 바뀌게 됩니다.
목동이 우연히 발견하여, 잠을 이기려고 마시던 음료가 결국은 세계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뒤에서 수행했으니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거 같습니다.

 

 

 

 

 

 

 

 

 

 

 

개화와 서양화의 상징 커피, 일본과 한국의 커피 전래
이렇게 유럽으로 전달된 커피는 역사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고, 18세기 남미와 아시아지역이 식민화 되기 시작하면서, 남미와 아시아지역으로 재배지역이 넓히며 커피의 세계화가 시작됩니다.
커피 소비처 역시 북반부 전역으로 넓혀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19세기 동아시아 지역에 처음으로 커피가 소개가 되는데, 이 지역에서 커피는 침략과 문명개화 그리고 서구화의 상징이 됩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과 미 해군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 이후를 계기로 열도에 커피가 전래됩니다. 일본에서 커피의 인기는 사실 녹차라는 대체 상품이 있는데다가, 비싸게 수입을 해야하기 때문에 높은 가격으로 대중의 인기를 끈것은 아니었지만,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즐겨마시는 음료가 됩니다.
일본인 중에서 대표적으로 커피를 즐겨 마신 사람이 바로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때 암살을 당했던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그는 영국 유학 등을 경험하였기에 1650년 커피하우스를 처음으로 열었던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그 당시에 커피를 접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자국의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커피가 열도에 전래되자 위스키 등 양주와 함께 커피를 즐겨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하였던 1909년 10월에도 특별열차 안에서 커피를 마실 정도로 애호가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울러 커피가 상류층 기호에 맞았는지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커피 전파가 시작됩니다.

19세기 말 무역이나 선교 등 여러 목적으로 방문한 서양인들을 통해 커피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커피를 가리켜 양탕국, 가배차, 가비차라고 부르기도 했던 커피는. 1884년 1월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한강변 창랑정(滄浪亭)에서 ‘조선에서는 최신문물(that latest nouveaut- in Korea)이었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라고 회고록으로 적은 것이 대한민국 커피와 관련한 가장 오래 된 기록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궁중에서도 최소한 서양인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커피를 도입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예가 1884년 호러스 뉴턴 알렌이 조선 궁중 시종들이 커피를 대접하였다고 기록한 것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커피는 양탕국이라고 불렸습니다. 양반들은 외국인에게 커피를 선물 받으면 두고두고 아껴 마셨다고 전해지며 특히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도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조예가 있었는지 1898년 실각한 권신 김홍륙이 고종을 암살하려고 고종이 마실 커피에 독약을 탔는데 평소 마시던 커피와 향이 다름을 눈치채고 독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식민화로 시작한 베트남 커피
동아시아에서 서양화와, 상류층의 기호품으로 커피가 정착이 되면서 대중전파가 시작되지만, 베트남에서는 식민화의 일환 중 하나인 선교사에 의한 현지재배로 시작하게 됩니다. 커피가 처음 베트남에 전해진 것은 식민 시대였습니다. 서구 열강이 식민지를 늘려가며 통치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받았습니다.
베트남에 커피나무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57년으로 추정됩니다. 1857년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주로 남부 지역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도입된 커피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식문화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커피는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문화 한 부분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예는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은 커피를 카페(Ca Phe)라고 하는 데, 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카페 핀(Cafe Fin)이라고 불리는 커피를 내리는 도구를 이용하여 커피를 내리고 주로 연유를 섞어 즐겨마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밀크커피보다 조금 더 진하고 단맛이 나는 커피로, 이 연유를 넣은 커피는 프랑스인들의 카페오레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위해 우유와 생크림 대신 보관이 용이한 연유를 사용했고 이것이 정착되어 지금의 베트남 커피 문화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파가 시작된 베트남의 커피는 식민지배의 상징이었고 소규모로 재배됐지만, 베트남의 위치가 커피재배에 적합한 북위 20도, 남위 20도 사이 지역에 위치해있다는 점, 그리고 통일후에 외화벌이 수단으로 선택이 되면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베트남 전쟁을 거쳐 통일 이후인 1975년부터 서부 산지 지역과 동남부 지역에서 본격적인 커피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생산·수출량을 높여갔으며 그 결과 1987년 이후부터 세계 커피 시장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러면 베트남 커피는 어떠한 인연으로 세계시장에 1990년대 이후 혜성처럼 등장했을까요?

베트남과 동독 그리고 냉전붕괴
베트남은 2022년 기준으로도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현재의 베트남 커피 생산 시스템을 만든 주체는 커피를 처음 도입한 프랑스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입니다.

독일은 예나 지금이나 커피소비량이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로 커피 소비량이 많은 나라입니다. 이러한 점은 분단시절에도 마찬가지였고, 동독정부는 민생안정용으로 술, 담배, 커피 소비를 장려했고, 국가 예산의 2%를 커피 공급에 투입했을 정도로, 커피공급은 동독 민생안정에 필수였습니다.
1975년 브라질에서 이상기후로 인하여 커피나무의 절반이 죽어버리는 검은서리 흉작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하여 전세계적으로 커피 물량 부족현상이 발생하자 동독정부는 치커리와, 콩을 51%의 콩과 섞은 커피 혼합물인 Kaffe Mix를 공급합니다.
문제는 이게 맛이 끔찍 한데다가, 콩과, 치커리로 인하여 커피포트를 고장나게 하는 주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독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은 동독정부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은 이러한 커피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처음에는 에티오피아로 갑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으로 인해커피 수급을 제때 제대로 받기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됩니다. 특히 1977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분쟁으로 인한 내륙물류에 차질이 생기면서 결국 동독은 에티오피아의 대안처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동독은 이러한 커피 수급문제를 해결하고자 전통적 커피 생산지인 에티오피아로 찾았지만, 에티오피아는 당시 내전으로 인하여 별 도움이 안되지 동독은 다시 에티오피아의 대안처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독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독은 1986년 베트남과 커피 생산협정을 맺습니다. 즉 커피 생산이 시작되는 1990년부터 약 20년간 베트남내의 생산량의 절반을 동독정부가 구매한다는 조건이었죠.

동독은 커피에 진심이었습니다. 동독은 우방인 쿠바와, 앙골라 같은 나라를 통해 베트남에 커피농장 건설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을 공급했고 베트남은 동독을 믿고 커피 재배면적을 12배나 더 늘렸습니다. 그리고 동독 정부는 베트남 커피 재배지역에 수력발전소와 주택, 병원 등도 건설해 주었죠. 품질이 좋은 아라비카종 커피 대신 베트남 커피농장엔 로부스타종이 대량으로 심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커피는 지금처럼 유전학 기술이 잘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고, 아울러 최초 생산까지 현재는 1년여 정도 걸린다면, 당시에는 4년 정도가 걸렸을 정도로 성장이 느렸습니다.

그러나 1989년 유럽 사회주의권은 붕괴되고, 90년 계약을 했던 동독은 서독에 흡수 통일이 됩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재배면적을 12배나 확대했고, 엄청난 수확량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는데 판매할 곳이 막막 해졌지만, 결국 베트남은 국가 개방을 하면서,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수출처 다변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커피는 오히려 당시보다 재배면적이 더더욱 확대됐고, 플랜테이션보다는 자영 농 중심의 사업으로 번창하면서, 현재의 베트남 커피 생산 체계가 완성됩니다.

지금까지 커피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베트남과 세계의 커피이야기를 뒤로 하고, 베트남에서 재배되고 있는 커피종과 더불어, 커피콩의 종류는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커피 원두의 종류 및 특징
커피 원두의 종류는 품종별로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원두 종류 4가지 유형

 

아라비카 원두
아라비카 원두는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인기 있는 커피 원두 종류입니다. 수 세기 전에 에티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금까지 소비된 최초의 커피 원두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아라비카라는 이름은 7세기 아라비아 (현재의 에멘)에서 인기가 있었던 콩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라비카 재배 조건
아라비카 원두는 섬세하기 때문에 재배하기가 어렵습니다. 환경의 영향을 잘 받고 질병에도 걸리기 쉬워서 정성과 관심을 담아서 키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기계를 사용해서 대량 재배와 수확이 불가능해서 사람 손으로 하나씩 가꾸고 수확해야 합니다. 까다로운 재배조건에 추가로 그늘, 물, 높은 고도가 필요합니다. 작은 키의 식물로 키가 작기 때문에 수확하기는 편리합니다.

아라비카 맛, 특징
아라비카는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원두가 비싼편입니다. 아라비카 원두는 보디감이 좋고 부드러운 향기가 있으며 단맛, 싯만, 감칠맛이 모두 뛰어납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풍미와 아로마가 특징입니다. 카페인은 로부스타보다 함량이 적습니다.

주요 생산국
브라질, 콜롬비아, 멕시코, 과테말라, 케냐,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하와이, 코스타리카

로부스타 원두
아라비카 원두 다음으로 많이 들어봤을 만한 원두 종류입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원산지이고 현재는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며. 특히 베트남에서 인기가 있는 원두입니다. 가격이 저렴한 품종입니다.

로부스타 재배 조건
로부스타는 기후 변화나 토양 등 환경 변화에 잘 견디고 기생충과 질병에 대한 저항이 강합니다. 낮은 고도에서 자라고 기계로 재배하고 한번에 가공합니다. 로부스타 원두는 다른 원두 품종보다 크고 둥근 편입니다. 키는 아라비카 식물보다 훨씬 크게 자랍니다.

로부스타 카페인
로부스타 원두는 아라비카 원두에 비해 두 배의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카페인은 로부스타 나무를 튼튼하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카페인은 질병에 대한 식물의 자기방어이기 때문입니다.

로부스타 맛, 특징
로부스타 커피는 마실 때 쓴맛이 강한 편이고 묵직한 보디감이 느껴집니다. 고품질의 로부스타는 질감이 부드럽고 산도가 낮습니다. 하지만 많은 로부스타가 안 좋은 기후에서 저품질로 많이 생산되어 맛의 평가가 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가격이 싸기 때문에 인스턴트커피의 원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좋은 품질의 로부스타는 우유나 설탕을 첨가해도 풍미가 떨어지지 않아서 베트남 커피와 아이스커피에 어울립니다.

주요 생산국
베트남, 브라질, 인도네시아, 서아프리카

리베리카 원두
리베리카 원두는 요즘 구하기가 어렵지만, 커피 역사에서 중요한 원두 종류입니다. 원산지는 중앙 및 서부 아프리카입니다. 1890년 커피 녹병으로 인해 전 세계 아라비카 커피나무 90% 이상이 죽게 되자 대안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의 리베리카 식물로 눈을 돌렸습니다. 최초로 시도한 필리핀 (당시 미국 영토)이 리베리카 커피 공급국으로 떠올랐으나 필리핀 독립 이후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1995년에 다시 리베리카 원두는 세계 커피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아라비아 원두가 이미 시장을 잠식하여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리베리카 재배 조건
리베리카는 덥고 습한 기후에 잘 견디며 낮은 고도에서도 잘 자랍니다. 현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주로 생산되고 전 세계 커피 공급량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리베리카 원두 맛, 특징
리베리카 원두는 다른 원두보다 크고 비대칭이 있으며, 불규칙한 모양을 가진 세계 유일의 원두입니다.
톡 쏘는 꽃 향과 대담하고 스모키 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생산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❹ 엑셀사 원두
엑셀사 원두는 리베리카 원두 계열로 재 분류되었지만 리베리카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엑셀사를 따로 분류하는 커피 커뮤니티가 많습니다. 엑셀사는 리베리카와 같이 큰 나무에서 자라고 유사한 아몬드 모양을 가지고 있어 리베리카 계열로 재 분류되었습니다.

엑셀사 원두 맛, 특징
엑셀사 원두 맛은 다크 로스트가 떠오르는 풍미와 더불어 시큼하고 과일 향이 나는 바디 맛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됩니다. 커피의 복잡한 풍미가 특이성을 돋보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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