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웹이라는 우주 망원경이 지구를 떠나 우주에 안착한 뒤 보내왔다는 사진들을 꽤 관심을 두고 살폈다. 천문학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운하들의 이름을 꿰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진으로 보는 별들은 감동이다. 그들의 탄생과 절멸의 순간들이 한 프레임에 고스란히 담겨 몇 십억 년을 빛으로 날아와 내 눈에 안착했다는 사실은 숨막히는 일이어서, 우주에서 무작위로 날아오는 미세한 중력파를 감지한다는 천문대 하나가 세상 가장 작은 형태로 내 눈 속에 세워져 있는 느낌이다. 무한의 경이를, 미물의 눈이, 감각으로 보는 일을 어째서 신은 허락하는가 싶은 지경이다.
그래선지도 모른다. 별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도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이 경이로운 무한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경험은 외려 단명한 유한의 삶을 뼈저리게 한다. 17세기 벽두에 르네 데카르트가 자기 내면을 ‘성찰’하며 한계 없는 사유의 힘에서 오는 존재의 위대함과, 같은 이유로 존재가 위대할수록 무한자를 인식함으로써 오는 유한자 존재의 하찮음을 동시에 느꼈을 때, 그는 아마 17세기 버전의 제임스웹으로 자기 내면의 우주를 비추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두 가지 광학적 우주가 그대로 날아와 박히는 21세기 벽두다. 다만 그때는 관념으로, 지금은 과학으로 느낀다는 사실만 다를 뿐.
광막한 우주는 굳이 제임스웹이 아니었더라도 인류가 오래전부터 인식했던 듯하다. 옛날, 누군가는 이런 유한의 감정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일생을 즐거움에 둘러싸이게 하자고 말했고, 또 누구는 같은 이유로 엄결한 삶을 추구하며, 삶을 바름과 금욕으로 둘러싸고 허송하는 세월을 막고 싶어했다. 대체로 나는 전자의 에피큐리안에 가까운 것 같다. 거대한 별이 자신의 에너지를 다하고 사그라들 때 내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흩뿌려지는 숭고한 장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이루던 먼지 하나까지 화끈하게 허공에 뿌리듯, 내 유한자의 삶도 그처럼 시시하고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을 훗날, 그 먼지 샘플의 내 미립자를 분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 참 간지나게 살았구나’ 느끼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날, 모서리를 들어 이리저리 보는 어느 예리한 화학자에게 몇 개의 갈지자로 된 내 삶의 세포 배양액이 조심스레 전달되고, 얹혀 놓은 현미경을 확대하며 놀라는 그의 눈에 자유라는 미토콘드리아와 간지라는 리보솜, 즐거움이라는 미세 섬모들의 합이 발견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래서 그에 의해, 이 사람은 삶의 우연에 기꺼이 미끄러져 들어갔고 시시하지 않은, 생긴 대로의 삶을 살았다는 근사한 추인을 받기를 부디 나는 바란다.
비록 빛의 파장을 선별하는 우리 감각의 한계이긴 하지만, 별들마다 색깔이 다르고 수명이 다르며 생김새와 빛과 온도와 형태와 특성이 하나같이 다른 우주의 별들을 인간의 삶에 빗대는 경우가 많다. 우주에 무한히 많은 별과 행성 중에 같은 별과 행성이 없는 만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신기하게도 과연 그렇다. 차이와 다름, 구분과 분별은 아마 조건 지어진 것들의 미스터리한 특성일테다. 그것은 유일함을 안고 살아가는 업보와 같은 것이어서, 시작과 끝이 있는 것들의 특질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러나, 그렇지만, 너는 너만의 삶을 살고 있냐고 한번 더 물어오는 어느 용기 있는 자의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한다면,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떨구게 된다.
언어가 생기고 지배와 피지배가 나누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인간의 삶은 만인에 대한 개인의 생긴 대로 살기를 위한 절절한 투쟁이었다. 제도의 억압과 개인 욕망의 대립, 시대적 보편과 개별자 특수의 대결, 집단의 동일함과 개체의 유일함, 유사한 개인의 광범위한 산출을 위한 교육과 개성의 유지를 위한 집요한 단체성의 거부, 이른바 전체와 개별의 무한한 싸움이었다. 그랬었다고 믿는다. 칼 포퍼는 각자 개인의 욕망을 충실하게 드러내며, 생긴 대로 사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열린 사회라 했지만, 칼 포퍼의 열린 사회도 유치한 민주주의 놀이에 쏙 들어가는 거대한 담론 게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쨌거나 사회의 인간은 제 생긴 대로 살기가 당최 쉽지 않다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유의 힘으로 우주(무한)의 한 중간에 나(유한)를 데려다 놓는 관념론적 존재가 되기도 했다가,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기는 실존주의적 존재가 되어가며 현실에 전전하기도 해야 한다. 그 무수한 과정에서 ‘나’라는 대리석 바위 덩어리를 파내고 두드려 드러내야 한다. 내가 이국의 낯선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은 모두 그러한 과정이라 믿는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는 이 낯선 곳은 ‘그 과정’을 겪기에 맞춤이다. 생경한 나를 만날 기회가 많다. 나도 몰랐던 내가 불쑥불쑥 드러난다. 아, 이게 나였구나 하는 장면들이 쌓이며 억눌렸던 성격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제 생겨먹은 모습을 가만히 남처럼 응시하며 받아들이면, 문득 느낌표 하나가 쿵하고 떨어진다.
스스로 말미암아,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 나 이전의 오래전 나를 이제야 마주대하는 비밀을 알아가는 것, 말을 타고 달리던 선조들과, 맹수에 쫓기던 기억과, 모음으로 말하던 아주 아주 오래된 추억을 기억하는 것, 거친 밥을 먹으며 더러운 손으로 날짐승의 간을 파먹고도 걱정하지 않았던 날들.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해서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 것,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하고는 내 입술을 지그시 눌러 생긴 인중처럼. 이제껏 자조하며 살아온 경조부박의 삶을 폐기하고 말의 갈기 같은 삶을 다시 불러들여, 아, 생긴 대로 살 것,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다 살고 싶은 욕망으로.
물론 일상은 고달프다. 가끔 힘이 들기도 하고 저 아래로 처박히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점점 나로 살아가는 인생은 나를 들뜨게 한다. 생긴 대로 산다는 게 이런 거였다. 한바탕 책과 씨름하고 여전히 밝았던 토요일 오후, 시간을 잊게 된 날, 내 안에 무엇이 울컥 솟아나 중언부언으로 쓴다.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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