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는 최근의 핫 이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개념은 원래 1992년 미국의 SF작가인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소설 『스노우 크래시(Snow Crash)』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가상’, ‘초월’의 의미를 갖는 ‘메타(Meta)’와 ‘우주’ 또는 ‘세계’을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입니다. 메타의 세계로 버스를 타고 넘어가는 구나 우스개를 해도 그리 틀린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 버스가 그 버스는 아니겠지만요. 주로 SF물에서 거론되기 시작하더니 다양한 방면으로 두루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공한 영화로 거론되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에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혼동하는 분이 있는데 이와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리고 보니 왠 버스가 이리 많나 싶기도 합니다.
메타버스는 가상의 세계에서 자기를 대체하는 아바타를 이용하여 실제 현실과 같은 경제, 사회, 문화적인 활동들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상의 세계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구축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 기술입니다. 퍼스널컴퓨터에 인터넷이 연결되면서부터 메타버스의 개념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개개인의 삶에 침투해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관계의 연결구조를 형성해 갑니다. 그러한 네트워크의 확장된 세계가 메타버스입니다. 아바타를 이용해 가상의 세계-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활동을 해 본 경험은 이미 대부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유행했던 사이월드가 대표적입니다. 가까이로는 포켓몬을 응용한 게임 앱도 그렇습니다. 많이 거론되는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도 메타버스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타버스가 ‘Hot’해진데 대한 일등공신은 COVID-19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메타버스의 기본 중 하나가 ‘비대면’이니까요. 업무도, 학업도, 진료도, 쇼핑도 방문을 자제하거나 최대한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해야 하니 결국 IT기술이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COVID-19가 사라진다 해서 메타버스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메타버스의 세계가 실제 세계에 혼합된 예가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는 듣는 것처럼 낙관적인 미래를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현실의 세계가 뱃머리를 메타버스의 바다로 향하고 있고 이를 ‘스마트’한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외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메타버스를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이 결합된 것으로 이해하며 나아갈 미래의 모델로 삼는 것은 위험합니다. 메타버스 낙관론자들은 여기에 사용되는 디지털기술의 핵심 키워드를 ‘인간 중심’이라고 외치지만 실상 이 기술은 지금까지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보여준 기술의 부정적 측면과 동일하게 인간의 인간 다움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초년시절, 삿뽀로가 어딘지도 모르는 신참 디자이너였던 제게 삿뽀로에 위치한 재일교포의 주택 프로젝트가 맡겨졌습니다. 자료실에 가서 일본에 관한 정보들을 뒤지고, 이국적 흥취의 주택 디자인에 흠씬 빠져 있던 때가 떠오릅니다. 무거운 책들을 대출해 자리로 들고 오며 마치 이미 도판 위에 멋진 주택이 그려졌을 것처럼 상상하며 흐뭇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정보를 살피고 취합하고 컴퓨터로 아이디어를 정리합니다. 연필 끝에서 나오는 손맛도 옛날 말입니다. 단지 생산성입니다. 구상한 안을 러프하게 그려보는 이미지 스케치도 사라졌습니다. 스케치업, 레빗 같은 프로그램으로 3차원 모델링을 하니까요. 효율은 더 좋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줄었습니다. 머리가 상상하기 이전에 먼저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해 버리니까요. 게다가 지금은 어느 개인에게 프로젝트를 맡기지 않습니다. 시스템과 조직이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건축가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흔한 삿뽀로 맥주를 보면 그때 기억이 추억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릅니다.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입니다. 아마 삿뽀로맥주가 망하지 않는 한 기억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나아지고 있는 걸까요? 삶은 더 여유가 있어졌을까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말로 인간 중심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을까요? 건축물의 설계에 오토캐드라는 기술이 도입되었을 때 설계가 획기적으로 진화할 것이라 했습니다. 제도기술이 발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카피해서 옮겨 붙이면 되는 일은 편합니다. 시간은 단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적으로 건축을 발전시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차원의 도면으로 3차원을 만들어 낸다는 레빗 프로그램은 신기했지만 더 많은 업무 양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만큼 많은 리소스가 들어가야 하고 장비는 확충되어야 합니다. 투자는 더 늘어야 하고 다시 또 배워야 합니다. 앞서 기술을 익혔던 선배들은 재교육을 받지 않는 한 퇴출될 것입니다. 익혔다 하더라도 근육이 싱싱한 후배들의 빠른 손놀림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건축이 발전하는 걸까요? 그 빠른 놀림 때문에 야근이 줄었을까요? 도시와 건축의 공간을 바라보며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은 늘었을까요? 포털사이트들이 생겼을 때 종이 신문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종이 신문도 있고 디지털 신문도 있습니다.
그냥 하나가 더 늘었을 뿐입니다. 메타버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잘해왔던 세계에 하나를 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최근 메타버스의 논의는 다분히 의도가 있는 증폭된 호들갑입니다. 자본을 증식하고 이윤을 얻기 위한 기업의 이해와 디지털기술 접목으로 일반 대중에게 무관심의 피난처를 제공하고자 하는 권력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겠지요. 전자가 팔아버릴 물품의 시장을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면 후자에게는 과거 3S와 같이 사람들의 이목을 무력화시킬 세계의 필요성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얻는 다른 이익들, 편익들이 제공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수물일 뿐 우리의 삶의 가치를 중심에 두게 하지 않습니다.
초기산업시대나 테크놀로지시대나 사람은 여전히 주변에 머뭅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자본이고 권력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대중은 소비처이자 소비를 위한 생산의 도구일 따름입니다. 인간의 소통을 위해 개발된 소셜 미디어가 저 멀리 있는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 정작 옆 사람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것이 이 기술이 보여주는 결과의 민낯입니다.
읽고 있던 메타버스의 책을 덮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메타버스가 아무리 인간 중심의 세상을 외쳐도, 사람들이 아무리 기술의 발전을 맹신하며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지향하고자 하여도 그것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라는 도피처를 제공하는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테크놀로지의 화려한 술수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 가상의 어떤 세계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에 그러합니다. 삶은 현실입니다. 가상은 가상일 뿐입니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