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노라니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거실 전체를 채우고 있는 유리창으로 거리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큰 길 건너 공사 현장도 여전하고 사철 하얀 꽃망울을 커다랗게 피우고 있는 꽃나무도, 타는 듯이 쏟아지는 노란 햇빛도 그대로입니다. 심지어 언제쯤 달리게 될 지 해마다 시험운행을 미루고 있는 비어 있는 메트로 1호선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와는 같은 듯 달랐습니다.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작년의 일입니다. 그 때에 저 큰 길을 달리던 오토바이와 차량은 멈췄고 사람들의 모습은 철망과 바리케이드 뒤로 자취를 감췄었습니다. 그때 나는 바깥 출입도 할 수가 없어 감옥에 들어 앉은 수형자처럼 이렇게 앉아서 거실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날아오는 비둘기가 창 밖에서 갇힌 나를 구경하다 제 집으로 날아가기를 반복하던 때였습니다. 그 기억이 지금을 생소하게 합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나서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마트도 열려 있습니다. 아무도 줄을 서라고 노려보지 않습니다. 마당에 나서도, 수영장에 가도 경비원이 양 손을 휘저으며 불 나게 달려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왔습니다. 2019년 10월, 군에 입대할 때 보았으니 만 2년 7개월만에 다시 보는 얼굴입니다. 부자 사이가 틀어져 서로 보지 않겠노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하늘길이 막혀서 이제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주변에 흔합니다.
부모님의 어려운 일을 당함에도 마지막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자녀,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부모, 생이별한 부부….
2021년 동안 쌓였던 이웃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넘치도록 많습니다. 그러니 아들 잠시 못 본 것은 사소한 정도로 치부하면 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참 생소합니다. 거의 이 년 가까이 통제와 격리의 목줄을 걸고 살았는데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음이 생소합니다.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기도 합니다.
한 해 전의 상황이 가끔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다시 오지 않을까요? 거실 창 앞에 붙어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화두처럼 달고 다닌 ‘일상’이라는 게 무얼까요? 날이 더움에도 유리에 하얀 김이 서렸습니다. 혹시 일상이란 두 개의 창문으로 보는 하나의 하늘이 아닐까요?
브라질에서 CM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머물던 곳이 상파울로 주(州) 따우바떼 시(市)라는 곳이었습니다. 따우바떼에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따우바떼의 하늘은 유난히 넓습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넓은 탓에 하나의 하늘에 여러 가지 현상이 함께 벌어집니다. 한 구석에서는 먹장구름에 비가 내리고 있고, 다른 한 편의 하늘엔 마른 번개가 치고, 맞은편 하늘은 여전히 맑은, 도대체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들이 동시에 벌어집니다. 심지어 주위는 모두 맑은데 제가 서 있던 장소 근방만 폭우가 쏟아지는 희한한 일을 겪은 적도 있답니다. 이런 탓에, 특히 우기엔 일기를 예측키 어렵습니다. 맑다 가도 갑작스레 적란운이 피어오르며 금세 요란한 천둥과 번개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기 십상이니까요. 제가 머물던 곳은 한 호텔의 6층이었는데 도시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기에 방에 앉아 웬만한 거리의 풍경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방에는 두 개의 창이 있습니다. 어느 휴일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보았는데 하늘 너머로 먹구름이 멀려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폭우가 쏟아지겠거니 하고 창문을 닫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때 문득 다른 쪽 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로 보인 것은 청명하게 개인 하늘 뿐이었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같은 하늘인데?
평소엔 두 창을 모두 열어 두는 경우가 없었는데 그날 마침 커튼을 걷고 나머지 한 창문을 열어 두었다가 희한한 풍경을 마주친 것이죠. 양 쪽으로 전혀 다른 날씨를 보게 되었으니까요. 한 창문으로는 짙은 먹구름과 빗줄기, 비를 피해 뛰는 사람들의 번잡한 풍경을, 다른 창문으로는 맑고 푸른 하늘, 평온한 마을의 일상을 한 공간 안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따우바떼의 하늘이 넓어 다른 기상 현상이 같은 하늘에 펼쳐진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창이라는 한정된 통로를 통해 동시에 보게 되니 얼마나 신기하던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을 각기 다른 방향의 창을 통하여 보면 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한 켠의 창에서는 한참 어려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데 다른 창의 풍경은 언제 그랬냐 싶게 맑은 하늘이 펼쳐질 수 있겠지요. 마치 2022년의 창과 2021년의 창을 같이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싼 상황이 코로나바이러스로 통제되었던 암울함과 모든 통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지금을 두 개의 창으로 동시에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의 흐름을 한 눈에 바라볼 수만 있다면 두려울 일이 없겠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그런 안목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늘이 변화 무쌍함을 갖추고 있다 해도 한 하늘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창을 통해 보면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듯싶지만 하늘을 빙 둘러 바라보면 이곳을 때리는 거센 비와 바람은 이제 곧 건너편 마을의 하늘과 같이 맑게 개일 것을 알리는 축포요 나팔소리에 불과합니다.
인생에도 날씨가 있습니다. 변하고 움직입니다. 항상 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종일 흐리지도 않습니다. 흐를 때가 있으면 멈출 때가 있고 멈춘다 싶으면 다시 움직입니다. 그게 사는 일인 듯합니다.
동나이의 한 골프장에 갔습니다. 너른 초원에 하늘이 커다랗게 펼쳐져 있습니다. 올려다볼 필요도 없이 파란 하늘이 바라보는 시야 곳곳을 촘촘히 채웁니다. 저 서편 하늘에 크게 먹구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타고 비냄새가 흘러옵니다. 곧 이 곳으로 밀어 닥치겠지요. 몸을 돌려 동편을 보니 맑습니다.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 뒤면 그곳의 사람들은 주행하던 오토바이를 멈추고 비를 피하기에 분주할 테이지요.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비로 뒤덮였던 서편의 지역은 다시금 평안을 되찾을 것입니다. 폭우라도 하늘 전체를 덮지는 못하니까요.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