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름의 이용도가 많이 떨어집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사회에서 나를 부를 때는 직업이 메인이 되고 이름없이 성만 붙이는게 일반적이죠. 한 주필, 한사장 뭐 이렇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회생할을 하면서부터 풀네임을 다 불러주는 경우는 많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이름을 불러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업으로 제 정체가 드러나는 어른들의 사회라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도 한국에 들어오니 아주 가끔 제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습니다. 죽마고우들입니다. 그들이 불러주는 ‘영민아’ 하는 소리가 왜 이리 정겹게 들리는지. 그리고 가족들이 이름을 불러줍니다. 나이가 찼으니 아무리 웃어른이라도 영민아 하고 부르지는 않지만 어떤 명칭을 덧 붙이더라도 영민이라는 이름은 꼭 따라옵니다. “영민 선생” 같이 말입니다. 이들은 제 이름으로 제 정체를 파악합니다.
총각 때 만나 친구가 된, 고우古友가 엊그제 전화가 왔습니다. 이 친구는 한 종교 종파의 대주교로 살아왔고 가끔 이름이 신문에 실릴 정도니 꽤 사회적 영향력이 있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은퇴한 지금도 나라에서 불러내어 정부가 내준 자리를 맡아 일을 하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안고 삽니다. 이 친구가 내 소식을 듣고 연락을 준 것입니다. 전화가 오긴 했는데 이름이 안 뜨는 번호입니다. 버릇처럼 헬로, 하니 “응 영민아, 나야 나, 김00 주교” 영민이란 이름까지는 반가웠는데, ‘주교’ 라는 말에 고개가 다시 들립니다. 제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응 미안해, 버릇이 되서 나야 00이” 하고 다시 자기 이름만 밝힙니다. 모든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10여년 후배와 카톡을 나누면서 ‘자네’라고 불렀더니, 부탁드릴 말씀이 있다며 “자네라고 부르시니 형님이 너무 늙으신 듯합니다. 사장이나 회장으로 불러 주시죠”. 이 후배 역시 지도자 급 인사라 회장 자리를 몇개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후배에게 자네가 맞나요, 직책 호칭이 맞나요?
골프채널에서 프로골프 선수들이 나옵니다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는데 “한영민 프로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한결 같습니다 저는 좀 거슬립니다. “프로 골퍼, 한영민입니다” 가 어울리지 않나요? 그렇게 하는게 예의인 듯하기도 합니다. 프로골퍼라는 직업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골프프로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타인을 대하는 게 맞지 않나요?
자식이 나이가 들면 대체로 부모님들도 자식의 이름대신 직책을 부릅니다. 고위층 자식 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많지요. 아마도 그 직책이 자랑스러운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눈도 귀도 어두워지신 모친이 어렵게 저를 알아보고는 “영민이구나” 하는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행복합니다. 제가 누구의 자식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듯합니다. 친구도 마찬가지죠. 친구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그 직책 전에 시작된 관계라면 이름을 부를 겁니다. 타인이 있는 자리라면 직책을 불러야겠지요. 그런데 많은 친구들이 누가 있건 없건 친구의 이름대신 직책이나 지위를 부릅니다. 황회장, 박박사 등.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래도 흉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불러주면 뭔가 존경심이 담긴 호칭처럼 들리니까요.
하긴 호칭이 중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저, 이름을 불러도 좋고, 직책을 불러도 좋은 허물없는 친구가 많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