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 해전사의 백미
이번 호에는 윙후에(Nguyễn Huệ; 훗날의 광쭝황제)가 초창기, 베트남 최대의 농민운동인 따이선(Tây Sơn ; 西山) 봉기를 주도할 당시 남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윙(Nguyễn;•阮)씨와 남부 태국군과의 연합세력 5만여 명을 1785년 1월 19일 남부 띵양성, 랏검-쏘이이뭇(Rạch Gầm-Xoài Mút)에서 단 하루만에 격퇴한, 베트남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윙후에의 명성은 전국을 뒤흔들었으며, 차후 잔존 세력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광쭝황제로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771년, 따이선(Tây Sơn;중부 베트남 빈딘성 일대)에 살던 윙냑, 윙르, 윙후에 삼형제는 당시 남부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윙(Nguyễn)씨 수하 권신의 전횡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다. 당시 이들이 부유한 세도가의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의병의 세력은 날로 강대해져 갔다. 1776년, 따이성 의병군은 그 여세를 몰아 퀴년성(城)과 광응아이성을 점령하고, 다시 빈투언성을 공격해 윙(Nguyễn)씨 군대를 격멸했으며, 야딘(Gia Định; 호치민시)성에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1783년 6월, 결국 윙가의 주군 윙안(Nguyễn Ánh)은 사이공을 버리고 남쪽의 푸국섬과 꼰다오섬을 전전하다 급기야 태국에 구원을 요청해 5만여 군사와 300여 척에 이르는 태국 군대의 힘을 빌려 메콩 델타 지역을 공격하기로 한다.
전투 일지 1784년 7월, 태국군대는 윙안(Nguyễn Ánh)을 도와 따이선(Tây Sơn) 봉기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띵양성을 진격해 들어온다. 5만여 명의 군사를 태운 3백여 척의 군함은 찌우땅(Chiêu Tăng), 찌우승(Chiêu Sương), 사윙(Sa Uyển), 찌우주위빙(Chiêu Chuỳ Biện) 등 태국군을 대표하는 명장들이 대거 출동했으며, 이들은 윙안(Nguyễn Ánh)의 3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2갈래 길로 나뉘어 띵양성을 진격해 들어온다. 1784년 12월, 씸-윙(Xiêm-Nguyễn) 연합군은 야딘(Gia Định; 지금의 호치민시 일대) 동쪽지역을 점령한 후, 띵양성 짜떵(Trà Tân) 지역에 주둔하여 미토(Mỹ Tho)성과 야딘(Gia Định)성을 칠 준비를 마친다.
1785년 1월, 윙후에(Nguyễn Huệ)는 이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2만여 군대와 함께 퀴년(Quy Nhơn)을 떠나 야딘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그는 적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야딘성을 방어하려는 소극적인 전략을 뛰어넘어, 미토(Mỹ Tho) 지역으로 곧바로 쳐들어가 씸 군을 섬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이 지역의 토착민들로 구성된 민병들과 긴밀한 협조하에 완벽한 공격방어태세를 구축했으며 메콩강 일대 6~7km 사이구간인 랏 검(Rạch Gầm)에서 소아이뭇(Xoài Mút)지역 일대 일대에 에 기습공격을 감행할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다. 1785년 1월 19일,마침내 결전의 태양이 떠오르고, 윙-씸 연합군이 수로를 따라 올라오자 따이성 군은 기다렸다는 듯 집중 포격을 가한다.
태국군은 결국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퇴양난의 고립지경에 빠져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그나마 해변으로 기어 올라오는 적군을 매복한 따이성 군대가 전광석화처럼 섬멸하며, 이로 인해 적장 찌우땅(Chiêu Tăng), 찌우스응(Chiêu Sương) 및 윙가의 가주 윙안(Nguyễn Ánh)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태국으로몸을 피해 달아나고 만다.
태국군과의 전투 이후
1786년 7월 21일, 이처럼 남부를 정벌하여 세력을 확장한 윙후에 삼형제는 북부의 찐(Trịnh;鄭)씨를 공격, 탕롱에 입성해 레 왕조하에서 북부 지역의 주인 노릇을 해 온 찐씨 세력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이에 레조(朝) 마지막 왕인 찌우통(Chiêu Thống: 1786~1788년)은 윙후에(Nguyen Hue)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청(淸)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1788년 11월, 청의 건륭(乾隆)황제는 똔 시 응이(孫士毅)를 베트남 원정군 대장으로 삼아 20만여 명의 병력으로 베트남 북부를 공격토록 한다. 하지만 이에 윙후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광쭝황제라 칭하고, 왕위에 올라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탕롱 근교의 청군 기지를 기습하여 패퇴시켰다.
광쭝황제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로 꼽히고 있는 이전투로 인해 청나라와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1789년엔 토지대장, 1780년에는 호적을 정비하고 문화와 교육의 창달에 힘을 기울였으나 1792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떠이 선 왕조는 예견했던 대로 급격히 쇠퇴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윙 왕조로 이어지게 된다.
사가들의 평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윙안(Nguyễn Ánh)과 씸(태국) 군의 침략을 단 1회의 전투로 몰아낸 랏감-소아이뭇(Rạch Gầm – Xoài Mút) 전투는 베트남 해전사상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이자, 오늘날까지 베트남 민족에게 가장 알려진 전쟁이다.
세계해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들어 오늘날의 베트남 사가들은 “전투를 시작한 지 단 하루만에 2만여 따이성 군대가 그보다 배 이상으로 많은 4만여 명의 씸군과 수천 명의 윙안부대를 수장시켰다는 것은 세계 해전사를 살펴보아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케이스다.
특히 씸 국의 침략은 베트남의 독립과 주권에 대한 대단히 위협적인 사건이었음이 틀림없었는데, 당시 이 일대는 윙가의 가주였던 윙안의 본거지로, 여기저기서 이들에 호응하는 내부의 적들이 야딘 지역의 절반이 넘었다. 하지만 윙후에는 야딘성 일대가 위협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지 10일 만에 군사를 정비해 퀴년에서 이곳으로 단숨에 진격해왔으며, 즉시 야딘(Gia Định) 지역을 회복하고 씸 국왕이 점령하고 있던 남부 일대 영토까지도 수복했다”며 이 사건을 대단히 높이 평가 하고 있다. ‘주변 형세와 민심을 이용한 종합예술’ 또 다른 사가들도, “광쭝 황제는 이 전쟁으로 인해 ‘싸움의 승패는 군사의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는 우세한 화력과 병기를 적절히 사용하여 적의 사기를 단번에 꺾었으며, 육군과 수병의 적절한 연합작전을 통해 달아나는 적군의 길목을 지켰다가 일거에 섬멸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이처럼 반동 봉건세력에 경종을 울린 떠이선 운동의 조류를 타고 윙안의 군대를 진압한 랏검-쏘아이뭇 전투는 주변 지역의 형세와 민심을 적절히 이용하여 치른 종합 예술”이라고 말했다. ‘타국의 사가들도 인정했다’ 이외에도 당시 윙(Nguyễn)가의 사가들 역시 “씸 사람들은 이 전투로 인해 따이선 군을 마치 호랑이 처럼 무서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국의 사가들도 “차크리 (Cha-kri I) 국왕도 스스로 대패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수하장수 였던 찌우땅(Chiêu Tăng), 찌우승(Chiêu Sương) 등의 아둔하고 경솔하며 교만한 태도가 패전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938년 응오귄(Ngô Quyền) 장군이 밧당(Bạch Đằng)강에서 중국의 신흥강국 남한(Nam Hán)을 무찌르고, 1288년 쩡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이 원나라 군대를 대파했듯 이번에는 윙후에가 남부 메콩강 일대에서 태국군과 주변 세력을 일거에 수장시킨 이 사건이야말로 베트남 수전사를 장식하는 3대 전투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전쟁들
● 흥브응 Hùng Vương 과 안증왕시대 ( ~ 938년)
진나라 등 역대 중국왕조와의 항쟁기 (기원전 2, 3세기)
비엣 떤 (Việt Tần ) 전투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봉기
바찌우 Bà Triệu 봉기
응오 전투 밧당 Bạch Đằng 강에서
● 중세 봉건시대 (939년~1858년)
송나라와의 1차 항쟁 (981년)
송나라와의 2차 항쟁 (l075~1077년)
몽고-원나라와의1차항쟁 (1258년)
원나라와의 2차 항쟁 (1285년)
원나라와의 3차 항쟁 (1287~1288년) 밧당
Bạch Đằng 전투 (1288년 4월 9일)
명나라와의 항쟁 (1406~1427년)
씸 (Xiêm; 태국)과의 항쟁 (1784~1785년)
베중전쟁 (1858 ~ 1945년)
● 1945~ 현재 (근, 현세)
프랑스 식민주의자와의 항쟁
딩빙푸 (Điện Biên Phủ) 전투1954년 3월 13일~5월7일)
베트남전쟁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호찌민운동 (1975년 4월 26일 ~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