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하늘이 어둑어둑해 집니다. 곧 비가 내릴 모양입니다. 열대몬순의 비는 어김없습니다. 바람을 보내 길을 준비하고 일시에, 그리고 강하게 대지를 뒤덮습니다. 전광석화같이 빠르게, 적의 예봉(銳鋒)을 여지없이 꺾어 버리는 질풍노도의 강력함으로. 사이공의 대지는 벼락 같이 덮치는 비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잠자던 땅 아래의 물까지 하늘의 물과 합세하여 순식간에 땅을 덮습니다. 도로가 강을 이루고 빈 땅이 호수가 됩니다. 하지만 도무지 그치지 않을 듯한 비도 시간이 차면 일시에 멈춥니다. 그리고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미련없이 툴툴 털며 다시 등장하는 태양에게 길을 비켜줍니다. 쎈 놈인데 쿨~하지요.
열대 국지성 집중호우인 스콜(squall), 거칠어 다루기 어려운 이 비의 선봉장은 바람입니다. 비가 올 때에는 바람의 형세가 먼저 달라집니다. 불던 방향이 별안간 바뀌기도 하면서 종잡을 수 없게 합니다. 어디를 어떻게 칠지 살피는 것 같습니다. 냄새도 달라집니다. 짙은 흙의 향을 쉬익 소리를 내며 뿜어 댑니다. 곧 엄습할 비의 크기만큼 행세가 거칠어집니다. 거리에 서있기가 불편합니다. 얼른 방 안으로 들어와 창을 닫습니다. 바람이 풀잎을 만지고 꽃을 어르고 나무가지를 툭툭 치는 모양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살살 달래는 듯하다 어느새 잎을 흔들고 가지를 흔들고 뒤이어 몸뚱어리를 휘어잡아 흔듭니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저만치 매섭게 몰려드는 먹구름을 기수로 삼아 비의 본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옵니다. 바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유리창 위로 날카로운 빗방울 하나가 칼날 같은 선을 긋고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런 가운데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보입니다. 바람이 작게 불 때에는 관심이 없어서, 크게 불 때는 두려움에 젖어 알지 못했는데 꽃들이, 그저 예쁘게만 보았던 작은 것들이 요란한 바람의 춤사위에도 처음처럼 자리에 붙어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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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 빗방울이 떼를 지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치마 솔기를 찢긴 나무들이, 풀들이 일어나 춤을 춥니다. 큰 비의 무리가 가까워진 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을 보고 선 가지들은 잎에 걸린 봉인을 모두 풀어 헤칩니다. 쏴아 쏴아 바람이 나무를 때리고 희롱하며 광란에 빠진 사이 땅은 검게 젖어 갑니다. 얼룩 자위가 커져 갑니다. 바람은 더욱 격해져 쇳소리를 지릅니다. 빗방울이 덩어리가 되어 갑니다. 그럼에도 꽃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아, 그제서야 그 신기한 것의 신비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바람은 꽃을 때리지만 꽃이 모두 떨어지도록 그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비가 육중한 무게로 대지를 몰아치지만 가지에 한점으로 붙은 꽃 한송이를 피한다는 것을요.

세상에는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고난의 광풍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그러하듯이 그 힘 역시 모든 인생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흔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랜 역사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바람이 세차고 비의 육중함이 바위와 같이 되어도 인내하고 기다리면 먹구름의 때가 지나고 햇살이 다시 모양을 드러낼 것임을 압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보편적인 지식입니다. 인류가 배워 나간 생의 연속성에 대한 진리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첨단의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차마 고리타분하기까지 합니다. 그 길은 인내하는 것이고 신뢰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끝이 있음을 알아 참아내고, 아무리 엉망인 듯하여도 우리 속에 주신 선한 것을 신뢰하며, 비록 세상에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 하여도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생을 움직이는 그 힘이 비록 우리를 때릴지라도 꺾이도록 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거친 바람이 꽃에게 그러하 듯 말입니다.
그런데 불신의 마음이, 조바심이, 당장의 내 배부름을 먼저 채우는 이기심이 우리를 가지에 붙어있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른 방안이 없을까 귀를 세우고 두리번거리게 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변치 않기에 진리입니다. 참신한 것, 처음 들어본 것, 새로운 발상이 그 가운데 진리의 조각을 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 자체로 진리일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하는 신비한 거울과 같습니다. 유전자와도 같습니다. 역사의 질곡마다, 질병이 덮치고 전쟁이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할 때마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인류의 핏 속에 흐르는 진리의 DNA가 우리에게 호소하여 살아 숨쉬는 길로 인도합니다.
이 DNA는 우리의 실책을 돌이키고, 돌아보지 못한 다른 이를 돌아보게 하며, 나아갔던 길의 방향을 바꿀 용기를 갖게 합니다. 그것은 서점 안 깊은 곳 밝음이 미치지 못하여 수년째 쌓인 먼지의 두터운 켜가 무게가 되어 누르는 아래에서도 여전히 형형한 활자의 빛을 놓치지 않고 숨쉬는 책들이 말하는 내용들과 같습니다. 외치지 않지만 함성보다 강하고 드러내지 않지만 펄떡거리는 심장을 꺼내 보이는 것처럼 처절한 것, 신선하지 않지만 변함이 없고 고리타분하지만 생명의 면면한 고동이 둥둥 살아 요구하는 절실함, 그것이 진리가 가진 힘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세상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근원의 소리 없는 힘이요, 누구라도 꺾지 못할 강한 힘입니다.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문명의 붕괴에도, 인류를 삼킬 것 같던 질병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도 마지막까지 꽃을 떨어지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꽃을 떨어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꽃의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으면 꽃은 떨어집니다. 열매는 생명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땅의 샘이 열리고 하늘의 물이 쏟아져 내렸던 기원 전 대홍수의 기억 속에서도 신은 생명을 보존함으로써 멸망을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내일이 어찌되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것을 기대하며 애쓰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람이 꽃을 떨어뜨리지 않았던 섭리입니다. 이는 상황에 따르는 처세가 아니요 오직 진리에 속한 지혜입니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태양은 다시 비춥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먹구름의 날은 신이 허락한 날들 까지만 세상을 어둠으로 가릴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날이 다시 이르기까지는 비를 들어 세상을 때릴지라도 꽃이 아예 떨어지기까지 바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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