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은 우리에게 아픈 상처이지만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립니다. 약 3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고 그 가운데 약 3만 7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미국임에도 전쟁의 의미가 축소된 채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의아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라는 세계적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발발한 전쟁이었기에 주변 강대국들에게 있어 한반도 밖으로의 확전은 안된다는 무언의 약속이 작용했던 이 전쟁의 성격을 알고 보면 나름 이해가 갑니다. 유엔이 결의하여 참전한 첫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극동에서의 국지전, 제2차 대전의 부속 전쟁, 혹은 냉전의 잔존물 같이 여겨진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승리도 패배도 아닌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종결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요. 당시의 분위기에 대하여 한국전 참전용사협의회 셀 스칼래토 회장은 ‘우리가 귀국했을 때 퍼레이드는 없었다. 그냥 전역했고 직장으로 갔다’고 회고합니다.
국가로서는 잊혀질 수 있었겠지만 개인들에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사자인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은 그들 개인의 삶과 가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참전한 미군들은 전쟁 후유증에 대해 국가나 주변으로부터 관심과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영향은 가정으로 확산되게 마련입니다. 전쟁이 진행형이 되어 가족이 함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환영받지 못한 참전은 아예 한국에 대한 관심을 끊고 귀를 막고 지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전자가 아예 실종되어 버렸다면 가족들이 겪어내야 할 상황은 보다 심각해 집니다. 많은 경우에 가족들은 그런 이를 아예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자 한답니다. 아내는 자녀에게 아빠의 이름을 꺼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실종된 그들의 이름은 모두에게 금기어가 되어 버립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기에 아예 떠올리려고 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임명호 교수에 의하면 가족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슬픔을 넘어 분노나 서운함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사망한 게 아니므로 그것에 대한 상상이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트라우마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덩이처럼 커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재조건화가 되어서 한국은 미운 나라 정도가 아니라 그 국가 이름 자체로 트라우마화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비엣 탄 응우엔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전쟁은 두번씩 싸운다. 한번은 전쟁터에서, 또 한 번은 기억 속에서.” 전쟁은 전쟁 자체로도 참혹하지만 끝난 이후에도 기억에 상처를 남겨 또다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미국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6.25전쟁으로 실종, 전사한 미군 중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군인은 2021년 4월 기준 7,599명입니다. 이들을 찾기 위해 2008년부터 한미 공동으로 유해 발굴을 시작했지만 발견된 실종자 유해 수는 아직 미미합니다. 최근의 성과로는 후가커 일등병의 신원이 확인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당시 23세였던 그는 1950년 7월 27일 경상남도 안의면 부근에서 소속부대가 공격을 받은 후 실종되었다가 지난 4월 유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가족이 자식을, 형제의 유해를 돌려받지 못한 채 전쟁의 기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이런 처지의 미군 가족을 초청하는 행사를 2015년 5월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작년에 코로나바이러스의 횡행으로 일시 중단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2019년 5월의 행사에는 참전 미군 전사자와 실종자의 유가족 50명이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해 혹자는 그깟 관광 정도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의외로 큰 위로가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전까지 잊혀진 전쟁으로 괴로워하던 이들, 특별히 실종자의 유가족들은 이 행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족이 희생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던 자원봉사자들의 말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미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한국에서의 시간을 지내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이 보상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희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발전한 한국을 경험하며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야 말로 참으로 도움이 절실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영상에서 이 행사를 기획한 이에게 미국 기자가 질문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 일을 구상하셨나요?” 그녀가 답했습니다.
“내가 불타는 차 안에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준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당시 우리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중에 고(故) 레이먼드 상병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춘천의 소양호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가족은 물가에 있는 돌들을 놓아 ‘굿바이 레이먼드(Good-bye, Raymond)’라는 글씨를 만들었습니다. 레이먼드 상병의 동생인 올해 88세인 알린 바튼 여사가 말했습니다.
“돌로 글을 썼는데 물가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우리를 떼밀었어요. 레이먼드 오빠가 이제 잘 가라고 하는 것 같았죠.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말이죠.”
고(故) 로렌스 병장의 동생인 81세의 제임스 그로스씨는 이 방문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종지부를 찍는 거죠. 잘 가, 래리 형. 형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처음 밟아 본 땅에서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 그것은 그들 인생의 미래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가족의 세월까지도 바친 것입니다. 거기에는 단지 희생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숭고함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덕을 입은 우리가 위로하는 것이 옳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6.25전쟁과 같은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유가족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올해로 71년이 됩니다. 그들의 상처요 아픔이었던 한국이 그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된 이름들 위에 새 살이 돋아 나기를, 그리하여 넉넉하게 안녕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굿바이 레이먼드.
夢先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