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고대사 미스터리 백제편(1)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는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믿고 있으며 대중 가요에도 등장합니다.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국가 멸망의 책임은 당연히 마지막 군주에게 있지만 의자왕의 경우는 왜곡이 심한 것 같습니다. 당과 신라는 승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보니까 의자왕을 폭군으로 기록해야 침략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경우 거의 폭정에 신음하는 이웃국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는 논리로 역사를 기술합니다. 따라서 망국의 마지막 군주의 잘못은 과장하고 잘한 것은 축소합니다.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중심으로 의자왕을 살펴봅시다.

[의자왕은 무왕의 장남이고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고 불렀다]

이 기록은 의자왕을 소개하는 첫 기록입니다. 상당히 우호적인 기록입니다. 즉위 이듬해 642년 신라 40여개의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숨통을 조입니다. 이렇게 의자왕은 전쟁 승리로 국토를 넓히고 국왕의 입지를 다진 후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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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권한이 강하면 귀족들의 권력남용은 점차 사라지고 백성들의 삶은 향상됩니다.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즉위 후 15년간 좋게 기록되다가 656년 부터 음란과 향락에 빠진 군주로 기록이 됩니다.
삼국사기 및 다른 사료에도 의자왕의 출생년도가 없어서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 묘지석의 기록을 근거로 의자왕의 나이를 추정합니다. 부여융은 615년 출생 했습니다. 당시는 10대 중 후반 결혼하는 관례로 볼때 부여융의 아버지 의자왕은 595년 전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의자왕은 30대 후반 632년 태자가 되는데 상당히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됩니다. 이처럼 후계자 결정이 늦은 이유는 후계자 결정에 영향을 주는 힘있는 세력이 많아서 후계자 경쟁이 치열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의자왕 모계세력이 좀 약했다는 사실 같습니다. 태자가 되고
8년 후 즉위한 의자왕, 즉 40대 중반의 늦은 즉위 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의자왕이 즉위 15년 후 즉 환갑의 나이에 여자와 향락에 빠졌다는 말인데 의혹이 많은 기록입니다.

1400년 전 의자왕이 살던 시대의 40대는 늙은이 취급을 받았고 당시 인간의 평균 수명도 40세 정도입니다. 100년 전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은 50세를 넘지 못합니다. 따라서 당시의 60대 나이는 지금의 80~90대 정도의 건강으로 추정 됩니다. 여자 술 향락에 빠질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가끔 아주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쟁터를 누빈 장군들과 국왕들은 피로가 누적되어 40세를 전후로 건강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의자왕의 건강이 탁월했다 해도 60대 초반의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린다? 이는 현실성이 없으며 역사 기록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대궐의 궁녀는 근대로 오면서 숫자가 늘어납니다. 조선 초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에 살던 궁녀는 대략 300명 미만이고 조선 말 고종때 4대 궁궐에 살던 궁녀는 600명 정도 됩니다. 조선 말기 2천만 백성들 중 궁녀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폭군들의 궁녀 또한 과장된 숫자 입니다.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은 경복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인데 삼천궁녀가 기거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궁녀들 모두 백마강에 투신했다는 기록은 한국 중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삼국유사 기록에 “부여 북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궁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라는 기록만 있습니다. 이는 백제 멸망을 슬퍼한 일부 궁녀들의 투신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추정 됩니다.
그러면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했다는 기록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장판각에 조선시대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선중기 시인 민재인 선생의 판각 입니다. 즉 시인 민재인은 “백마강부” 라는 장편 시를 지었는데 조선의 선비들이 즐겨 암송한 시 입니다. “의자왕은 구름같은 삼천궁녀를 바라보며 눈이 어두웠네” 라는 내용이 나오고 그후 시인 김흔의 시 낙화암 에는 “삼천궁녀들이 모래따라 몸을 맡겨 꽃지고 옥 부서지듯 물따라 떠내려가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더 와전되어 조선의 선비들은 여자의 절개를 강조하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듭니다 .

“임금을 모시던 우리가 당나라 군대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으니 차라리 삼천명 모두 백마강에 빠져 죽자 이에 동의한 삼천궁녀 모두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투신했다”

조선 중기에 지은 시 내용이 300년 간 확장되어 전달되다가 현대에 와서 대중가요에 삼천궁녀 노래가 등장하면서 우리 국민에게 삼천궁녀는 진실처럼 굳어집니다.

이번에는 의자왕의 어머니로 알고있는 선화공주 이야기를 살펴 봅시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 서동과 선화공주는 실제로 존재 했을까요?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은 백제 30대 국왕 무왕으로 추정 했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의 큰 딸 천명공주는 김용춘과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습니다. 진평왕의 둘째 딸 덕만공주는 신라 27대 국왕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입니다.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백제 왕비가 되어 의자왕을 낳았다고 하니까 김춘추와 의자왕은 이종사촌 형제가 되는 셈이죠.. 이상의 기록을 토대로 고대사 미스터리를 추적 해봅시다.

삼국유사를 토대로 다수의 학자들 해석을 정리 하겠습니다. 서동은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 후 태자가 되고 곧 백제 무왕이 됩니다. 따라서 선화공주의 장남이 의자왕 입니다. 의자왕은 모계의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서 30대 후반 나이에 태자가 되고 40대 중반 나이에 국왕이 됩니다. 백제의 무왕은 재위 40년간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치릅니다. 또한 의자왕 역시 아버지 무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신라를 공격합니다. 그러면 무왕은 처가 나라를 공격했고 의자왕은 외가 나라를 공격한 것인데 이를 두고 소수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다수 학자들은 당시 상황은 국익을 위해 친척들을 공격한 사례는 많다는 논리로 다수설은 유지 됩니다.

무왕은 왕비의 (선화공주로 추정) 요청으로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 합니다. 또한 미륵사 부근에 왕궁의 흔적이 있고 그곳의 지명도 왕궁리 입니다. 이에 소수 학자들은 선화공주는 익산 지역의 유지 딸이다 라는 주장을 했고 필자도 합리적인 해석이라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두개의 학설 모두 근거없는 주장인데 우리 국민들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진실로 알고 있어서 더이상 논쟁은 없었습니다.

미륵사에는 탑이 하나 있었는데 백제 최초의 석탑입니다. 미륵사 탑 이전에는 나무로 만든 목탑 입니다. 진평왕때 만든 황룡사 9층탑은 목탑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 세가지 보물이 있는데 이는 황룡사 9층탑, 진평왕 옥대, 장육존상 입니다. 우리가 배운 신라 3보 입니다. 황룡사 탑 이후에 분황사 탑을 세웠는데 이는 모전석탑 즉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 입니다. 따라서 큰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미륵사 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 입니다. 미륵사 탑 이후 모든 탑들은 석탑으로 만듭니다. 통일신라때 만든 불국사 탑, 석굴암 등은 모두 미륵사 탑 이후에 만든 것 입니다.

이렇게 의미있는 미륵사 탑을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 되었고 또한 미륵사 역시 복원 공사를 합니다. 2001년 절반 이상 훼손된 미륵사 탑을 시작으로 미륵사도 복원하는 첫 삽을 뜹니다. 미륵사 탑 복원 공사가 진행되던 2009년 탑의 중심기둥 속에 금동사리 장엄구와 금판 기록이 나옵니다. 194글자로 된 금판에는

[사택 왕비는 미륵사 창건을 건의하고 무왕은 미륵사 창건을 명해 659년 미륵사가 완공하다 사택 왕비는 좌평 사택덕적의 딸이다] 이로써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판명 되었습니다. 일연 스님은 역사 사료 분석보다는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듯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왕비를 여러명 둘 수 있어서 선화공주는 여전히 존재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일 수도 있고 백제 귀족의 딸 일 수도 있습니다. 의자왕 역시 사택왕비의 아들이 아니라 선화공주의 아들일 수도 있겠죠? 이처럼 고대사는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 가장 합리적인 추측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이야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한 “소서노”, 우리나라 최초의 여걸 “소서노”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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