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30대, 십년을 위한 나침반”

1. 에둘러 첨단에 이른다
세상의 슬픔은 조급함에서 온다. 절망의 순간은 환희를 잉태하고 있으니 기다림은 기쁨을 출산하는 산통의 과정이다. 삼 십대 십년은 이 지루한 기다림과의 싸움이다. 기다리고 둘러가고 쉬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삶을 남김없이 다 살 수 있는 능력이다. 빨리 가는 얕은 사람보다 느리게 가는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스토리가 없는 삶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인생의 그늘 하나 없는 사람은 재미없다. 세상에 진실한 두 가지가 있다. 자기 입으로 씹어 삼킨 밥과 자기 발로 걸어간 길이다. 밥은 먹은 만큼 내 몸을 살찌우고 발은 둘러간 만큼 근육을 만든다. 인격 없는 인간이 볼품없는 만큼, 근육과 상처 없는 매끈한 다리엔 아무도 업히려 들지 않는다. 서른은 자신이 발 딛고 선 두 다리에 상처로 무장된 육근을 만드는 시기다.

나선螺線을 기억하라. 소라의 껍질은 휘휘 둘러 끝에 닿는다. 그것이 직선이었더라면 소라는 살아남지 못했을 테다. 꼭 그와 같이 직선의 인간은 안타까운 것이다. 둘러가 본 적 없고 둘러갈 생각이 없는 사람은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 주제에 대해서나 할 말 다하는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은 유머와 반어를 알지 못하는 불행한 자다. 유머를 설명해야 할 때 우리는 허탈하다. 그 사람과는 맥락 있는 얘기를 피한다. 시를 산문으로 고쳐 쓰면 더는 시가 아니게 된다. 시의 입장에선 곤혹스런 일이다. 둘러간다는 것은 행간의 비약과 복선을 품은 삶이다. 논리를 따져 묻거나 논리적 이해의 영역인지 수사학적 전회의 영역인지 알지 못하면 훗날 시와 같은 삶은 살지 못한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곧장 가는 사람이다. 목적지 도달에만 혈안이 되어 엑셀을 밟는 드라이버는 창밖에 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먼 산에 지는 해가 얼마나 황홀한지 알지 못한다. 우리 생이 꼭 그와 같으니 죽음으로 곧장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쫓기고 쫓기다 결국 막다른 곳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이를테면 산의 방식이다. 산은 둘러가는 자의 것이다. 둘러가지만 첨단에 닿는 것이 산의 진심이다. 그러나 빨리 갈 때를 경계하고 높이 오를 때를 두려워하라. 오른 만큼 거칠게 내려서야 하니 아무렇게 핀 봄 꽃들을 보며 서서히 내려서기를 바라거든 지금 잠시 둘러가는 이 시간을 깊게 흠향하라.

서른의 십년은 정상이 아니다. 세상은 정상에 오르려는 자를 비웃는다. 세상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도 그럴수록 높은 곳을 봐야 한다. 높은 곳은 어디인가? 산의 꼭대기인가, 조직의 사다리 맨 윗자리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관료 끝머리인가? 아니다. 그런 곳들은 내가 죽어도 누군가가 끊임없이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 또 누군가 오를 수 있는 영원의 자리다. 살아있는 생명의 자리가 아니다. 바라봐야 할 곳은 메마르고 건조하고 시시한 ‘세상의 자리’가 아니다. 첨단의 ‘높은 곳’은 우리 자신이다. 각자의 꿈이 실현되는 자리다. 직선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를 수 없는 곳, 애를 쓰고도 이르지 못할 수도 있고, 바로 눈 앞에 보이지만 여지없이 둘러가야 할 때도 있는 곳이다. 그것은 차라리 내 마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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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그곳에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 정상에서 황금으로 만든 탁자에 천연히 앉아 ‘나’는 나를 기다린다고 속삭이며 암호 같은 시를 끝맺는다. 알베르 까뮈는 ‘니체의 정상’을 두고 삶을 온전히 느끼며,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것이라 해석한다.
기꺼이 자신을 던지고, 담금질해야 이를 수 있는 곳, 까뮈의 솔루션은 ‘다 사는 것’이다. 부조리한 삶을 눈 깜박거리지 않고 노려보는 것이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삶을 모두 사는 것으로 닿을 수 있다고 이해했다. 이때 가장 까다로운 암호인 ‘나’를 해독하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높은 정상에서 황금탁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니체의 ‘나’와 다 살 것을 주문하는 까뮈의 ‘나’는
‘북극성’이다.

우리는 북극성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북극성은 나침반의 끝을 떨리게 한다. 닿을 수 없지만 내 삶을 떨리게 만드는 삶에 북극성 하나를 상정하는 일은 지루한 삶을 중단시킨다. 계획은 사무적이고 목표는 가깝고 목적은 전략적이다. 꿈은 어떤가, 손에 잡히진 않지만 가슴 뛰게 만든다. 주위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흘려듣거나 웃음거리로 여기는 첨단 하나를 간직한 나는 월납 백만 원짜리 보험보다 든든하다. 삶은 나침반처럼 부들거리며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바늘은 오직 꿈으로만 향한다. 비록 우리는 땅을 기어 다니는 수평의 삶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겠지만 수직의 첨단을 향하는 꿈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어느 순간 거북목을 꼿꼿이 그리고 천천히 척추도 세워 첨단을 바라본다. 오래된 서류가방을 스스로 던지고 피켈로 바꾸어 잡는다. 잘 차려진 밥상 대신에 거친 코펠 밥을 나누어 먹고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넣은 단출한 배낭을 둘러매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든다. 갈기 같은 머리가 휘날린다. 첨단에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로소 삶은 우리를 떨리게 한다. 이것이 서른, 십년의 스피릿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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