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보낸 직원이 있습니다. 일년 여 파견 나와있던 한국 본사의 총각과 우리 현지법인의 베트남 처녀 사이에 찌리릿! 전기가 통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때아닌 혼주가 되어 한국의 혼례식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또 석사과정의 공부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직원도 있습니다. 제게 좋은 계기가 있어서 모교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도시계획을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습니다. 벌써 두 해도 전의 일입니다.
아끼던 직원들이 한국에 머물고 있으니 본사에 출장 갈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함께 자리를 가질 일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때마침 터진 COVID-19로 인해 잠시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억하기로는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 2019년 11월 말인가 합니다.
그 날은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 차가운, 그러나 따스하게 여겨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인사동의 고즈넉한, 옛 한옥 냄새가 나는 음식점을 약속 장소로 잡았습니다. 그들은 정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도착한 저보다도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접는 저를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공부하러 간 친구의 이름은 상(Sang), 시집 간 친구는… 아, 이름을 한글로 옮겨 적기가 여전히 힘드네요. 그래서 예전에도 칼럼에 소개할 때 가명으로 썼으니 실례를 무릅쓰고 그냥 마이(Mai)로 하겠습니다.
처한 상황이 다른 탓이었는지 둘의 차림새는 많이 비교되었습니다. 상은 공부하러 온 사람이라 바깥은 다니지도 못하는지 비 오는 분위기와 똑같이 어둡고 우중충했고, 마이는 새환경에 적응하는 새색시 답게 빗속에도 상큼했습니다. 마이는 남편과 동행했는데(당연하지요. 그도 우리 회사 동료 직원이니까요) 신기하게도 남편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그때도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습니다. 뭐라할 입장이 아니냐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전 그녀의 이름을 한글로 옮겨 쓰지 못할 뿐 발음은 정확히 하니까요.
오래전 일이지만 그들과의 대화 중에 기억나는 몇 가지를 편집해 옮깁니다.
“한국에서 일년 넘게 생활했는데 무엇이 베트남에서와
제일 달랐어?”
“인사를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너무 달랐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요. ‘감사합니다’ 또는 ‘미안합니다’ 라는 얘기를 금방 표현하는 게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베트남 사람들은 잘 표현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냥 미소를 짓고 말아요. 좋아도 웃고, 반가워도 웃고, 미안해도 웃고, 싫어도 웃죠. 말은 미소 안에 깊이 두는 것 같은 거지요. 그런데 그것을 쉽게 꺼내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 그런 모습들이 참 다르게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소득의 차이가 크니 사는 물리적 환경을 얘기하리라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한 감정을 말로 쉽게 꺼낸다는 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다니 마이 덕분에 대화자리가 갑자기 진지모드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빨리 빨리’가 무언지 알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저도 궁금했습니다.
“그건 시스템의 속도 같아요. 한국 사람들은 시스템 속도가 빠르니까 거기에 맞춰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고 빨라진 것 같아요. 그러니 베트남에 와서 답답하겠죠. 아직 시스템이 뒷받침하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그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빨라진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모든 것에 급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도 얻는 것이 있으니까요.”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를 발견해 가는 마이는 유투브를 개설해서 한국 생활을 소개하는데 열심입니다. 지금도 대학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상은 다른 부분을 얘기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와서 대학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한편 놀랐고 한편으론 절망했어요. 그때가 1월이었는데 너무 너무 추웠거든요. 그 전에는 그런 추위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한국말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건물이 너무 멀리 있는 거예요. 그 추위 속에 걸어야 한다는 게 끔찍했죠. 일단 오토바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일년을 지내보니 불편이 없었어요. 대중교통망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첨 안 거죠.”
베트남 사람들은 세 걸음 이상 걸으면 오토바이를 탄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적이 있습니다. 상은 도시계획을 공부하러 왔기 때문인지 그러한 특성을 대중교통망과 연결하여 얘기를 풀어 냈습니다.
한편 진지하게 한편으론 우스개로 박장대소하며 시간이어찌 가는지도 모르게 이런 말 저런 소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국어와 베트남어,영어가 짬뽕이 되어 왁자지껄한 우리 자리를 재밌어 쳐다보던 알바아가씨가 ‘여기 계산요’ 하는 제 소리에 흠칫 놀랍니다. 아, 이런, 여긴 한국이지. 한국에서는 카운터로 나가서 공손히 계산해야 하는데 자리에 앉아 ‘앰어이, 계산~’을 찾다니. 직원들과 대화하며 그들이 겪는 이국 생활의 불편함을 챙겨보려던 제가 오히려 이방인처럼 고국에서 불편을 느끼는 무언가가 생겨버린 듯했습니다.
호찌민과 서울 사이에는 바다만 있을까요? 두어 시간의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이 두 도시 사이에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인연으로 두 도시 사이에 고리가 되어 각자의 사연과 상황을 연결함으로 두 도시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 거지요. 공부를 하러간 직원도, 결혼과 더불어 새 삶의 터를 마련한 직원도 모두 연결고리가 되어 두 도시가 체온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고 말을 이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사람, 사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할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이 곳에서 만나는 베트남 사람들로 인해, 그리고 그들이 한국에서 만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이 두 도시는 점점 더 풍성한 이야기를 써 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COVID-19로 인해 이런 이야기들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시작되겠지요. 그때를 위해 그날의 기억을 기록해 두고자 합니다.
상은 최종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지난 2월 비록 온라인이었지만 학위식을 마쳤다고 합니다. 지금은 베트남으로 돌아올 날을 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댁 티를 벗은 마이는 어려운 때이지만 남편과 더불어 사랑살이, 서울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립습니다. 몸은 자리를 같이 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라도 두 도시 사이를 이어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어서 오렴, 상아, 모두들 너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단다.
알콩달콩 잘 살렴, 마이야. 항상 행복하기를 기대해.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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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