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가는 사람 남는 사람

오래된 일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진출한 유명 금융투자사의 임원이었습니다. 저보다 두어 달 늦게 베트남에 입국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처음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는 의욕이 넘쳐 있었고 그 의욕을 뒷받침할 능력과 배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난 사람’ 이었습니다. 그가 본사의 명령을 받고 귀임했던 때가 2014년입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형, 난 베트남 생활을 잘 못한 것 같아.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냈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가게 된 지금 와서 돌아보니 과연 무엇을 잘한 것일까 생각이 드네.”
잘 난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였기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는 현지법인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그 헌신의 방법론까지도 세련되어서 항상 폼 나고 멋져 보였으니까요.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이 곳을 먼저 이해하려고 애썼어야 했어. 그런데 왜 그걸 하지 않았을까? 내가 옳다고 생각했고 내가 중심이었기 때문이었지. 그러니 주변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 돌아갈 때가 되니 갑자기 그게 보이는 거야. 이력 한 줄로는 충분했겠지만 정말로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그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론처럼 그가 꺼내 놓은 말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땅을 축복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땅과 사람이 나를 축복할 수 있겠어?”
그가 생각난 것은 한 모임에서 만난 분의 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임에서 그 분은 ‘영화 속의 사이공’이라는 주제로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사이공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그 분과 초면이었던 저는 구석에서 조용히, 그저 초청해 주신 분께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반응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그랬습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차츰 설명이 깊어질수록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분은 전문가였습니다. 제가 드물게 만난
‘진짜’였습니다. 자기가 일하는 곳과 사람에게 애정이 있었고 그 애정을 논리를 갖춰 설명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지식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던 ‘L’Amant’가 첫 소개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나’와 화교인 ‘그’가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페리 선상에서의 장면과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위태로운 미래를 표현한 리무진 안에서의 컷들이 ‘메콩강’과 항구
‘사덱’, 두 사람을 태울 리무진이 기다리던 ‘빈롱’과 같이 ‘장소’가 연결되면서 추억의 영화가 아닌 생명을 가진 역사가 되어 재구성되었습니다.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다닌 학교는 3군의 레귀돈입니다. 제가 수시로 지나던 곳이지요. 그런데 영화는 레홍퐁 학교에서 촬영했답니다. 이 또한 반가웠습니다. 그럼 어둠 속에서 억압의 상징 같이 보였던 기숙사는 어디였을까 궁금했습니다. 지금의 1군 똔득탕 거리에 있는 사이공대학 유아교육학과라는 군요. 설명을 통해 영화의 장면과 현재의 사진을 교차해 봤을 때의 섬찟한 반가움이란! 갑자기 두 사람이 밀애를 나눈 쩌런의 그 집을 찾아가 엿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사이 저만치 서 있던 베트남이 그의 소개를 통해 성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The Quiet American’을 이야기하는 시간에는 아예 푹 빠져버렸습니다. 앞으로 다가선 베트남이 이제 저와 동반해 여행을 하고자 했습니다. 영화의 전개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동선이 바로 내가 걸었던 그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랬습니다. 최초의 미대사관이었던 은행대학, 주인공의 숙소였던 지금은 그랜드호텔로 바뀐 동코이 8번지의 게스트하우스, 주인공인 기자가 오후6시면 맥주를 시키던 콘티넨탈 사이공호텔의 테라스, 저녁마다 칵테일 타임을 즐기던 마제스틱호텔 루프탑 바. M바라 불린 이 곳은 제가 사이공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없이 지났던 동커이 162번지의 경찰서 앞길.
제가 아는 그 장소에서, 상상으로나마 주인공들과 함께 한 짜릿한 시간은 겨우 세 영화로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갔던 시간을 돌아 현실로 돌아오니 뭔가 허전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영화의 감동은 글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직접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의 제목은 ‘Three Seasons’입니다.

그 분은 영화를 통해 사이공의 이곳 저곳을 소개하며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는 사이공을 사랑하고 그래서 알고 싶었다고. 알아가다 보니 더욱 친근해지고, 정이 쌓이니 꺼내어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네. 사랑하면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 세월 중에 만난 사랑도 그랬습니다. 알고 싶어 조바심 나고, 한번이라도 볼까 두근거려 하고, 말없는 말에 가슴을 콩닥거리며 얼굴을 붉혀야 했습니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생리입니다.
그제서야 덜컹! 가슴을 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저 분은 이 땅을 축복하는 사람이구나. 그러니 이 땅과 사람들이 그에게 복이 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사이공의 어느 곳이라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미소 짓지 않을 장소가 있을까? 그리고 오래 전에 이 곳을 떠났던 후배의 남긴 말이 어떤 뜻인지 새삼 다가왔습니다.

때때로 저도 어떤 이들처럼 투덜댑니다. 그 분에게도 그런 게 없었을 리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늪에 빠진 것처럼 답답해지는 베트남 생활, 최소한 사, 오 년을 넘어 지낸 분들은 다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말로 그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나는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 이해 안 되는 이해의 근원을 찾아 또다시 탐구하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그의 작업을 문화탐색이니 하는 정도의 표현으로 한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은 곧 정년이고 임기를 다했으니 내년 초 한국으로 복귀할 예정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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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처럼 그도 떠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땅과 사람들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으려면 말입니다. 답은 주어져 있습니다. 먼저 영화를 다시 봐야 겠습니다. 그 장소들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이해하기를 시작해야 겠습니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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