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있는 하루
아무리 다른 나라들이 난리 중에 있어도 베트남은 역내에서 만큼은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낭에서 COVID-19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다시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과의 출입이 보다 용이해지리라는 실낱 같던 기대도 다시 접어야 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해외에서의 입국자를 원천 통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어 불편함이 컷음에도 장기간 확진자가 없는 것을 위안 삼았는데 또다시 시작되는 바이러스의 확산소식을 듣고 보니 한숨 밖에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도 좋은 형편은 아닙니다.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세에 두 손을 든 느낌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바이러스가 사회의 일원으로 정착해 버린 듯합니다. 그러니 두 나라 사이에서 사업이든, 학업이든, 아니면 가족의 일이든 무언가 하나는 연결될 수밖에 없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이럴 때 하소연할 데 없는 갑갑한 가슴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 어렵더라도 떠날 수는 있었는데 이제 당분간 그마저도 어려워졌습니다. 아예 출국 항공편이 막힌다는 얘기도 있으니 그동안 격리가 14일이네 어쩌네 하며 불평한 것이 차라리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간 생활의 어려움은 있었을지라도 정부의 강한 대처 탓에 어느 정도의 위생안전을 확보 할 수 있었다는 안심이 있었는데 이번 다낭발 확산사태는 이런 사회 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언론과 방역센터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들을 보면 작금의 사태는 베트남 방역 당국의 역량을 벗어나는 수준으로 확산될 듯합니다. 시민들의 불안한 마음도 그렇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불편을 배로 감수해야만 하니 알게 모르게 교민들 사이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탑처럼 쌓여 갑니다. 나아질 기미가 없는 이런 상황이 벌써 몇 개월 째인지요.
제가 아는 분은 한국에서의 따님 결혼식을 아예 연기했습니다. 당사자들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사정 때문에 연기를 할 수 없어 어머니만 한국에 가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아버지는 영상 메시지로 대신하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나마 이번 사건 전에 들어 가셨으니 다행입니다만 자녀에게는 일생에 단 한 번인 귀한 일인데 화상으로 밖에 축하할 수 없는 아버지 마음은 또 어떨까요.
자녀의 탄생을 보지 못한 초보 아빠도 있습니다. 작년말에 출산준비를 위해 아내를 들여보내고 덜컥 하늘길이 막혀버린 경우입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가는데 영상으로만 보고 있다하니 참,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 지요. 장례도 못 갑니다. 그러니 집안의 대소사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도와는 한 치도 관계없이 사람들의 사이에 이별이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생이별입니다. 그 가운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점유한 이 세계를 ‘광야’ 라 표현했습니다. 중동지역의 광야를 가서 보면 그냥 텅 빈 공간이랍니다. 바위와 암석밖에 없습니다. 풀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그러한 광야에 서면 그동안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들이 귀해진다는 거지요. 코로나가 우리 시대의 광야라 비교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던 일들이 단절되고 통제되고 그리고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속에서의 삶은 새삼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한국에 가는 일도 그저 맘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항공 티켓을 사고 공항에 제 시간에 도착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행위 하나가 막히니 모든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광야에 서 있다면 바람이 새로울 것입니다. 한낮의 무더움을 피하게 해 줄 그림자가 그리울 것입니다. 한 모금의 물이 그립고 그것을 만들어 낸 한 방울의 비가 너무도 소중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 바람, 그림자, 빗방울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요? 그런데 그 것뿐일까요?
무뎌져 버린 우리의 소중한 관계들도 그렇습니다. 가족이라면 의례 함께 있는 걸로 알았는데, 친구라면 언제든 시간만 나면 보는 걸로 알았는데.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든 기회 되면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그것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의 이 막막함.
코로나 바이러스가 갑자기 왔듯이 이 보다 더한 어떤 일이라도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런 관계가 여전히 있다면, 또한 그런 말을 상대에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요. 전혀 당연히 누릴 수 없음을 깨달은 것들을 여전히 당연히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오늘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이러한 일을 깨달은 그 분은, 그래서 전화기를 들었답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하려고요. 여전히 아버지의 대답은 단답형이고 별로 다를 것 없는 짧은 통화였지만 말미에 그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가 느끼기로는 잠시 침묵이 있었답니다. 그리곤 아버지의 너털웃음과 그래, 너도 잘 지내렴 하는 한껏 부드러워진 인사가 뒤따랐고요. 지금은 아버지와 긴 통화를 자연스럽게 한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가 되었다지요.
오늘 하루가 지나면 말할 수 있는 하루가 손쓸 틈 없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말해야 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고맙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부모님께,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형제자매에게, 친구에게, 기억할 모든 이들에게. 더불어 바람과 나무와 비와 나비와 별에게.
때를 놓치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고 건강해도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처럼요.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이 코로나 상황이 다낭 소식 하나로 순식간에 다시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누리는 당연함이 내일은 당연하지 않을지도요. 그러니 내일 말해야지 하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저물어 갑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채 지나가고 있습니다.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베트남현지법인 대표(법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