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5,Monday

또 다른 폭력

황망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바로 지난 424호 짜오칼럼 원고를 편집부로 전하고 난 그날 저녁의 일입니다.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오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고(故) 박원순 시장의 자살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뉴스에는 박원순 실종과 뒤이어 같은 이름으로 성추행 혐의 고소 사건의 기사 제목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예, 제가 알던 그 사람이 맞았습니다. 기사를 보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여러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최초의 성추행 사건을 유죄로 이끌어낸 변호사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는 남북공동검사단의 남측 대표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여성운동에 적극적이었고 권력에 의해 피해 받는 인권을 위해 수고한 이였습니다, 서울시 3선 시장이며 최근에는 유력한 대권 후보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기소의 내용은 저를 몹시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알고 보면 굵직한 정치인들의 자살이 여럿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동운동의 거목까지.
물론 개개인의 정치성향과 관점에 따라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박원순 시장에게서 예전의 황망함이 다시 듦은 물론 분노마저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가 사회에 끼친 공(功)이 가릴까 염려한 것도, 그렇다고 고소된 내용의 과(過)가 감춰질까 봐서도 아닙니다. 그 역시 생명을 끊는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존경 받아 온 그를 ‘나쁘다’ 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그들을 존경할까요? 그들의 삶과 어깨에 얹힌 무거운 책임 때문입니다. 그 무게를 이고 공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힘든 것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권력을 주고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할 권한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쥔 힘은 그들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공공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쉽게 그것을 잊습니다. 그들의 가진 모든 것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가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사업가였다고요? 그건 그의 과거 이력입니다. 그 이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지도자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팽개쳤습니다.
많은 지도자입네 하는 이들이 주어진 책무가 무겁다면 내려 놓고 떠나야 하는데 국민이 준 사명이라면서 붙듭니다.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랍니다. 그래서 모든 사안을 ‘엄중하게’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그런 입장인지라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면 참 앞뒤 안 맞는 말입니다. 그는 국민이 준 책무를 어찌 할 수도 없게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를 나쁘다고 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나쁜 것은 이번 사건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는 모함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제껏 숨겨진 범죄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쪽인지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죽음으로 기소가 중지되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는 명예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자신과 가족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건의 상대자는 어떨까요? 그녀가 정말 피해자라면요? 그녀는 분노할 대상도, 그러하므로 용서할 대상도, 보상의 기회도,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 받을 기회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나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또 다른 폭력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고 타인에게 용서할 기회를 빼앗은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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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사회가 어렵습니다. 코로나의 여파가 힘든 삶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힘든 점은 아직 그 영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안됩니다. 그것은 나쁩니다. 또 다른 폭력입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스스로와 주변에 가하는 무지막지한 폭력입니다.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비록 서울시장만큼의 무게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으로서, 누군가의 부모로서, 또는 자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과 삶에 대한 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것은 힘들어서, 또는 피하기 위해 내팽개치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 그것을 귀하게 다스리게 하기 위함 입니다.
살다 보면 그 안에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수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야 기회가 있습니다. 잘못을 했다면 돌이킬 기회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가, 그리고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어서 상대와 자신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잔혹하며 동시에 비겁한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잘 사용하라고 주어진 신의 선물과 같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과 존경을 담아 준 책무를 방기하는 것은 둘째 치고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위는 그가 지금껏 어떤 공을 첩첩이 쌓아가며 살아왔다고 해도 칭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살은 폭력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그리고 나와 관계된 모든 인생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이 글은 그의 죽음 기사를 본 금요일에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칼럼이 씬짜오베트남에 실려 여러분 손에 들릴 때는 아마도 사건이 발생한지 3주가 흐른 뒤일 것입니다. 그때에 이르기까지 많은 갑을 박론이 있겠지요. 누구 탓이냐로 또다시 패가 갈라져 의견이 분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을 남겨두고자, 그리고 혹여라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한 이가 있다면 그런 이를 위해 글로 옮깁니다.
박원순 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도합니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무언지를 보여주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만날 기회를 우리는 또 잃었습니다.
이 일로 상처를 받은 여성분을 위로합니다. 분노할 대상도, 용서할 대상도 사라져 버린 피해자의 찢어진 가슴의 고통은 당한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정의라는 프레임에 갇혀 국민을 말하되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한편의 죽음과 다른 편의 피해까지도 제 편에 서서 해석하고 이용해 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정치 지도자라 하는 이들이 제발 정신 차리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베트남현지법인 대표(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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