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통해 배우는 베트남의 역사 제 5탄
리트응끼엣 장군, 송나라 황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다
이 전투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웅은 지략과 용맹함으로 송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리 왕조의 리트응 끼엣 장군이다.
지난 호에 살펴본 대로 938년 밧당(Bạch Đằng)에서의 승리는 중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939년 띵응오붕(Tiền Ngô Vương)은 스스로 왕이 되어 꼬로아(Cổ Loa)를 수도로 정하고 중앙집권화된 정부를 세우는데, 이것이 베트남의 첫 독립국가이다. 하지만 944년 응오귄(Ngô Quyền)이 사망하고 나자 12명의 군 지도자들은 나라를 나누어 가진 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레호안 (딘 왕조), 송나라 원정군 격퇴 (송과의 1차 전쟁; 981)
924년 닌빈성 호아르(Hoa Lư)에서 태어난 딘보린(Đinh Bộ Lĩnh)은 12 사군 시대를 종식 시키고 국가를 통일한 후 왕위에 올라, 국호를 다이꼬 비엣(Đại Cồ Việt)으로, 수도를 호아르로 정하니 이가 바로 딘 띠엔 황제(Đinh Tiên Hoàng)이다. 당시 백전백승의 왕이란 뜻의 반탕브응(Vạn Thắng Vương)이 별명이었던 그는966~980년까지 제위에 올랐으며, 베트남 최초의 연호인 타이빈(Thái Bình•太平)이라고 병제를 개편하고, 제도를 개선했으나, 979년 도팃에 의해 장자인 딘 리엔과 함께 암살당했다. 그래서 생존한 아들딘 또안이 6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는다.
관민합동, 결사항전의 의지로 대승을 거두다!
당시 송나라의 태종이 이때를 놓칠 새라 총 공격을 감행하자 딘 왕조의 총사령관인 레호안(Lê Hoàn)이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딘 왕조를 위협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띵레(Tiền Lê;전레-980~1009년)왕조를 창건한다. 송나라측은 광동, 광서 등에서 군대를 동원해 내륙공격을 감행했고, 응응성(Ngân Sơn-까오방), 랑성(Lạng Sơn) 지역의 해군을 동원해 하롱만(Hạ Long)을 거쳐 밧당(Bạch Đằng) 강을 지나대라(Đại La)성과 북부 일대를 먼저 점령하고 최후에 수도 호아르(Hoa Lư)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송나라 왕은 친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레호앙은 민병대과 연합해 결사항쟁의 의지로 맞섰다. 그는 빈로(Bình Lỗ)에서 녕바우(Hầu Nhân Bảo) 장군이 지휘하는 송 군대와 박양성,박닌성 등에서 쩡컴또(Trần Khâm)장군의 부대를 패퇴시켰으며, 이어 밧당항을 침입한 수군과 랑선지방의 찌랑 요새에서도 송나라 군사를 격파했다.(981년;100년간 평화기 도래) 이후 레호안은 수 차례 사절을 파견, 결국 송나라는 986년 레호안을 정해절도사로, 993년에는 교지국 왕으로 봉했다.
딘왕조의 붕괴와 리 왕조 창건
하지만 그의 사후 여러 아들들 간에 권력 다툼이 전개되었고, 이중 롱딘이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4년간 제위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포악하고 향락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는데 별명이 응와 찌우(Ngọa Triều)로, 항상 누워서 정무를 보았다하여 부쳐진 별명이다. 결국 그는 재위 4년만에 사망하고 조정의 실권자이자 대신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리꽁우언(Lý Công Uẩn)이 재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리 왕조를 세운 리타이또( 1009~1028년)이며, 이로써 레 왕조는 30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리 왕조, 송나라를 패퇴시키다(송과의 2차 전쟁;1075-1077)
리꽁우언에 의하여 수립된 리(Lý)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장기집권 왕조로서 9명의 왕이 재위했다. 초대왕 리꽁우언은 1010년 호아르에서 탕롱(현 하노이)으로 천도했고, 국호는 딘, 레 왕조의 국호였던 다이꼬비엣을 그대로 계승했다. 한편 중국내에서는 여전히 다이비엣을 다시 정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존재하였다.
1069년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인 위기를 벗어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송나라의 위상을 되살리고 다이비엣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리왕조를 공격하였다. 당시 리왕조의 왕좌에 겨우 10살짜리 아이가 오르면서 왕국의 모든 권력은 리트응끼엣(Lý Thường Kiệt ) 장군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송나라의 침략을
맞이하여 베트남 최초로 ‘공격적인’ 방어를 취했다.
공격적 방어, 중국 본토를 공략하다
리트응끼엣은 1075년 십만 군사로 구성된 두 무리의 병력을 중국으로 투입하였는데, 한쪽은 눙족의 족장인 똥 단의 지휘하에 상륙하였고 다른 쪽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에 해상으로 침투하였다. 그는 당시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들을 시기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중국남부 지역에서는
‘해방자’가 되었다. 민중들은 리 장군의 원하는 바가 오로지 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리왕조의 군사들이 중국에 상륙하자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고, 병력들은 남중국의 구석구석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리 장군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1075년 10월 27일 송나라 남부대륙을 공격해 42일 만인 3월 1일 마침내 웅쩌우Ung Châu(난닝 지역)를 점령한다.
리 장군, 송+참파 연맹군을 대파하다
이에 대항하여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서 송나라는 참파 및 크메르왕국과 연맹을 맺었다. 1077년 10만의 송나라의 군사들은 참파군대와 함께 경계를 넘어서 뉴응우엣 강에서 리 장군의 군사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거친 싸움이 뒤따랐고 송나라의 군사는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전쟁속에서 리 트엉 끼엣 장군은 “어떻게 그 야만인들이 감히 우리의 땅을 침범하려 하는가? 그들은 반드시 패퇴할 것”이라는 시를 써 밤에 읊게 함으로써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강의 신이 한 말로 믿게 했다. 이를 통해 그어느 때 보다 사기가 높아진 군사들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송나라의 군사들을 총공격하였고,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 (송나
라 10만 대군 중 8만명 사망) 이후 리 장군은 송나라측과 5개의 전방 지역들(오늘날의 까오방과 랑썬)을 양도할 것을 포함하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리트응끼엣 장군은 이처럼 승리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법을 아는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베트남 최초로 중국 본토를 과감하게 공격함으로써 송나라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승리로 인하여 국가권력이 안정화되었으며(200년간의 평화기 도래), 이후에 들어선 쩐 왕조는 군사력을 더욱 강화시켜 두 세기 후에 닥치는 몽골의 공격에도 대항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전쟁들
● 흥브응 Hùng Vương 과 안증왕시대 ( ~ 938년)
진나라 등 역대 중국왕조와의 항쟁기 (기원전 2, 3세기)
비엣 떤 (Việt Tần ) 전투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봉기
바찌우 Bà Triệu 봉기
응오 전투 밧당 Bạch Đằng 강에서
● 중세 봉건시대 (939년~1858년)
송나라와의 1차 항쟁 (981년)
송나라와의 2차 항쟁 (l075~1077년)
몽고-원나라와의1차항쟁 (1258년)
원나라와의 2차 항쟁 (1285년)
원나라와의 3차 항쟁 (1287~1288년) 밧당
Bạch Đằng 전투 (1288년 4월 9일)
명나라와의 항쟁 (1406~1427년)
씸 (Xiêm; 태국)과의 항쟁 (1784~1785년)
베중전쟁 (1858 ~ 1945년)
● 1945~ 현재 (근, 현세)
프랑스 식민주의자와의 항쟁
딩빙푸 (Điện Biên Phủ) 전투1954년 3월 13일~5월7일)
베트남전쟁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호찌민운동 (1975년 4월 26일 ~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