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중종반정 5년 후 박원종을 필두로 반정 3대장이 연달아 사망합니다. 중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반정 3대장의 빈자리를 조광조가 채웁니다. 뛰어난 성리학자인 조광조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을 계획 합니다. 그러나 부국강병 민생안정 등 정치의 본분을 망각한채 유교 법도만 강조 합니다. 또한 조광조의 강직한 성품에 중종은 염증을 느낍니다. 사림들을 동원해서 임금을 압박하는 조광조를 보고 중종은 누가 임금이고 누가 신하인가 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마침내 임금과 신하는 크게 충돌하고 기묘사화를 잉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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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고 생각하는것을 밀어 붙이는 원칙주의자
조광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대가 누구이든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밀어 붙이는 성격입니다. 또한 같은 공무원들 중 조광조 자신이 소인이라 생각한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광조는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해서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도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조광조는 추종자와 적을 동시에 많이 만듭니다. 역사의 많은 권력자들이 부정 부패에 연루된 것과 반대로 조광조는 재물을 탐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신념대로 국사를 집행합니다. 그래서 조광조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학문 평가에 치중하여 군자를 뽑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조광조는 추천과 면접에 의한 공무원 선발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광조 자신처럼 사심없이 공정하게 공무원을 선발 하지 않습니다. 평민 중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취지는 사라지고 조광조 주변 사람들은 전부 학연 혈연 지연에 의한 추천을 하여 정작 능력과 도덕성을 갖추고 있어도 추천을 받지 못합니다. 또한 현량과 출신들은 전부 조광조 인맥을 형성하여 반대파에게 분노를 심어줍니다. 이렇게 조광조 라인이 형성되자 훈구파 대신들과 중종은 조광조를 경계합니다.
관직등용 4년만에 대사헌 임명
조광조는 관직에 등용되고 4년만에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에 임명됩니다. 현재의 검찰총장 입니다. 지나치게 빠른 승진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 화를 부릅니다. 조광조 개혁의 초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소인들을 몰아내고 군자가 다스리는 국가를 만들어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소인과 군자의 구별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한 조광조 라인의 사람들도 소인들이 들끓고 있건만 소인이라 판정한 사람들은 대게 훈구파 대신들이고 군자는 사림파들 입니다. 짧은 시간에 한 두가지 언행을 보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조광조는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번에는 이전의 개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공신이라는 엄청난 기득권을 박탈 당하니 죽기 살기로 저항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하면 조광조는 사법고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과정을 마친 후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4년만에 검찰총장에 임명 됩니다. 게다가 전체 사림의 대표 주자가 됩니다. 물론 조광조 본인의 실력이 탁월하고 강직한 성품이 임금 중종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 했습니다. 사실 조광조는 정치보다 성리학을 연구하는 성리학자나 뛰어난 제자를 양성하는 선생님 역할을 했다면 더욱 능력을 발휘 했을 것입니다. 조광조는 재물이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아랫 사람들을 보살펴 주위의 신망을 얻습니다. 옳은 일에는 상관, 심지어 임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추진하지만 500년 전 조선사회는 그러한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임금의 눈치를 보지 않은 거침없는 개헌
고려말 온건개혁파의 수장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고, 과거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현량과를 신설하고, 미신타파의 기치를 걸고 소격서를 폐지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주위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한 것입니다. 고려말 급진개혁파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임금까지 허수아비로 만든 후 성숙한 여건을 만든 후 개혁을 진행 했습니다 물론 조광조 처럼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성공합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임금이 자기편이라는 믿음 속에서 추진한 개혁입니다. 강직한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임금과 대비의 반대까지 물리치고 소격서를 철폐 했을때 임금 중종의 마음이 떠날까 걱정은 하지 않고 승리를 자축합니다. 그리고 이제 진정한 유교국가를 건설할 때가 왔다고 선언합니다. 뒤이어 가짜 공신들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킵니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광조는 정의구현 차원에서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훈삭제” 사건은 임금 중종과 훈구파 대신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소격서 폐지사건 후 중종은 조광조를 대면하기 무섭다는 표현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직한 성품에 거침없는 말솜씨, 게다가 많은 신하들이 조광조를 지지하는 모습을 본 중종은 상당히 피곤했을 것 입니다. 중종은 반정으로 등극한 자신을 지탱 시켜주는 힘이 공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위훈삭제 사건은 공신의 몰락 더 나아가서 중종 자신도 몰락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또한 국왕의 뜻을 무시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조광조에게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광조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듭니다. 조광조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은 용군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군주) 처럼 느껴집니다.
중종의 밀지와 시작된 조광조의 몰락
80% 이상의 신하가 임금인 자신보다 조광조의 눈치를 보는 현실에서 중종이 느낀 감정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조광조 요구사항의 정당성 보다는 왕권의 추락에 비참한 심정을 느낀 듯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여 조광조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리고 잔인한 반전을 노립니다. 조광조와 대립하고 자신을 지지할 남곤 심정 홍경주 등 3인에게 중종은 밀지를 내립니다. 야밤에 대궐 북문인 신무문으로 입궐한 3인방에게 중종은 조광조 일당을 모두 하옥시키고 역모죄로 다스려 모두 죽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당시 조선왕조 중종실록을 사관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 지난 4년간 조광조를 그토록 아끼던 임금이 악착같이 조광조를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같은 임금이 맞는가? 나는 서로 다른 두 임금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양 간 후, 사약을 마시다.
결국 조광조는 조작된 역모죄와 당여를 만든 죄로 귀양을 가고 한달 후 사약을 받습니다 조광조는 심문을 받으면서 전하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종은 조광조와 주변 선비들을 다 죽이고 싶었으나 증거가 없어서 일단 귀양을 보냈다가 한달 후 사약을 보내 전부 죽입니다. 이렇게 수십명을 죽인 기묘사화는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중종의 분노는 계속 이어져 사건을 확대하여 사림파 선비들을 계속 죽입니다. 항상 신하들의 중론에 따라 눈치를 보며 어명을 내리던 약한 중종이 돌변한 모습을 보이자 사관들이 “서로 다른 두명의 군주를 본 듯 하다” 라는 절묘한 표현을 남겼습니다. 중종은 죽을때까지 조광조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종이 그토록 아끼던 조광조를 중종이 죽이고도 분이 풀리 않았다니 어느쪽이 어떤점이 잘못 되었는지 역사의 평가는 다양합니다. 훗날 율곡 이이는 조광조가 너무 젊은 나이에 출세를 했고 일의 추진이 급했다 라고 평가를 합니다. 군주가 한 신하를 지나치게 총애하면 주변사람 대부분이 몰려들고 당파가 생깁니다. 조광조는 바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죄로 죽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된 당여를 만든 죄입니다. 조광조는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았지만, 보통의 경우 권력을 가지고 군주의 사랑을 받으면 탐욕을 부립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화를 부릅니다. 조광조의 사례는 많은 해석과 많은 역사적 교훈을 남깁니다.
도학정치를 꿈꾸던 사람파와 조광조
도학정치를 꿈꾸고 요순시대 태평성대를 이루고 싶었던 조광조는 4년의 짧은 관직생활 후 생을 마감 했습니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조광조 사후 조선은 많은 변화를 맞이합니다. 고려말 태동한 성리학은 조선 건국을 거치면서 부국강병, 민생안정에 치중하여 유교 자체의 연구보다 유교를 활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신들의 특권과 부패한 관료들의 출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이를 비판하는 사림파가 등장합니다. 성종때 등장한 사림파는 이념을 중시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세력들 입니다. 이들은 정몽주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군자라 칭하고 정도전은 변절자로 낙인 찍습니다. 아마도 사림파는 조선건국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진 듯 합니다.
현실성이 부족한 사림파의 주장이 먹힌 이유는 바로 훈구파의 부패에 있었습니다. 사림파는 성종때 비판만 하던 야당 입장에서 중종때 조광조를 필두로 여당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정치경험 부족, 민생보다 이념에 치중한 사림파는 집권에 실패한 것이죠. 비판은 쉬우나 정치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하지만 성리학 국가 건설이란 조광조의 꿈은 후진들에 의해 조금씩 실행됩니다. 조광조의 이념과 명분이 사림 선비들을 변화시킨 듯 합니다.
조광조는 성종때 시작된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제대로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서원은 조광조 사후 중종때 처음으로 건립됩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소수서원”이 조선의 1호 서원입니다. 또한 사림파의 숙원인 향촌 자치제인 향약이 실시되고, 유교적 신분제도가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정치제도 중 중국과 다른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낭관제도” 역시 정착되게 됩니다. 1.소수서원, 2.사림파가 생각하는 신분제도, 3.낭관제도 (전랑 자천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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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
조광조가 죽고 조선의 정국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을 변화시키는 초석을 놓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