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옵니다. 엄청 바쁘시죠들?
세상이 온통 겨울 눈의 흰색과 루돌프 코의 붉은 색으로 다 바뀌어갑니다. 여름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는 시간이지만 우리가 느끼건 아니건 세월은 이렇게 또 다른 매듭을 준비하느라 점점 분주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연말에는 몸도 마음도 전부 분주하긴 하지만, 묘하게 그저 즐겁지만은 않은 그런 기분 아니던가요? 뭔가 도시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하니까요, 분주하던 한 해를 돌아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겨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있는 시기입니다. 또, 이런 시간에는 자칫하다 뜻하지 않은 외로움을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세월을 따라 흐르는 군중에 섞여 생각 없이 함께 어울려 보지만, 어느 순간 숨을 돌리고 보면 공연한 외로움이 슬며시 스며들지 않던가요?
그렇다고 어디 도망갈 곳이 있는 한가한 인생도 아니니 그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짚어보며 또 극적여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베트남 진출자들이 그렇겠지만 베트남은 이주를 위한 곳이 아니라 사업상의 연이 닿아서 들어온 곳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 입장이니 베트남 자체에 대한 애착이 좀 가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한가해지면 자주 한국에 가곤 합니다.
특히 2 달여 이상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듯합니다. 거의 한계가 다가오는 듯합니다. 어떤 한계? 부족한 인내의 한계죠.
전체적으로 낯선 얼굴,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날씨, 아직도 대충만 들리는 베트남어, 일에 대한 전혀 다른 관념, 아 그리고 사라진 입맛을 돋아 줄 매운맛 음식에 대한 갈증까지 포함하여, 뚜렷한 이유 없는 갈증이 점차 쌓여져 가면, 가뜩이나 부족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납니다. 가족이 없이 혼자 지내는 인간은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 들어서는 처음과는 달리 베트남 직원들 때문에 일어나는 인내의 한계는 사라진 듯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베트남 직원들이 저 때문에 인내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화되었죠. 그만큼 제가 진짜 고루한 한국의 노친네가 된 모양입니다. 이제 그만큼 외국 생활을 했으면 좀 바뀔 만도 한 듯한데 워낙 강한 한국인의 본질은 여간해서 달라지지는 않는 가 봅니다.
그렇게 고루한 한국인의 전통적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면 마음 한 켠에서 슬그머니 뒷걸음을 준비합니다. 너무 늦게까지 남의 집에 남아있다는 뻔뻔함에 자리가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돌아봐 당장해야 할 급한 일이 없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고국행을 위한 가방을 하나 메고 집을 나섭니다. 배웅하는 사람도, 마중 나온 사람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나 다니는 나그네를 자처합니다. 이렇게 혼자라도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니 감사할 일입니다.
밤늦은 시간을 넘어 새벽 비행기를 타고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보니 아침입니다.
날이 밝아 왔는데, 장소마저 달라졌습니다. 마치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공간이동을 한 듯합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한반도의 차가운 아침 공기가 비행기 창을 흰 서리로 부분 포장을 합니다. 연꽃의 나라에서 하룻밤을 자고 났을 뿐인데 눈을 뜨고 보니 무궁화 꽃 만발하던 금수강산으로 변한 기적을 맛보고 있는 것인가요?
새벽 공항버스를 타고 아파트 근처 정류장에 내려 집사람이 픽업해 주기를 기다리면 잠시 주변을 살펴봅니다. 활기찬 아침, 출근길의 직장인들의 바쁜 모습이 보입니다. 차가운 아침 바람에 여기저기 날리는 보도 위의 낙엽들이 열하의 나라에서 벗어나 계절이 살아있는 고향으로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아침 시간, 영하의 날씨에 골프 클럽을 차에 옮겨 싣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오전 라운딩을 준비하는 골퍼들인 듯합니다. 이곳 주변에 골프장이 널려 있는 곳이라 저런 모습들이 흔히 보이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나라에서 왜 골프가 인기를 끄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겨울 찬바람에 몸은 움츠려들고, 추위에 오그라든 손발에 무거운 의상을 입고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희고 작은 공을 쫓아다니는 군상은 아마도 지구상에 한국인이 유일할 것 같습니다. 외국 골프장에서도, 아무리 심한 폭우가 쏟아져도 끝까지 공을 치는 인간은 묻지 않아도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공개된 팩트입니다.
왜 한국인이 골프에 재능을 드러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니죠, 왜 그렇게 골프에 빠져 사는지 그 이유가 쉽게 파악이 안 됩니다. 골프를 시작하지 벌써 30년이 넘고 골프 칼럼을 쓰다 말다 했지만 그래도 한 10여 년 이상 써오면서도 왜 한국인과 골프는 이리 가까운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골프가 맨탈 운동이니,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골프를 잘 치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왜 그 대상자가 한국인이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골프가 맨탈운동이라고?
그것을 아직 못 느끼시나요? 그럼 아직은 골프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쓰신 골프 책을 본 기억이 있는데 골프는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가요? 신부님의 말씀이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반론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이룬 사람인가요? 맞을 수도 있지만 절대는 아니죠. 세상에서 가장 골프 실력이 우수한 플레이어 중에 하나인 타이거 우즈가 영적으로 그렇게 완벽한가하는 질문이나, 영적 수준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의 골프 실력( 핸디가 26인가라고 합니다) 은 어떠한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영적인 영역을 포함하여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동의합니다. 영적 깨달음은 몰라도, 정신 함양,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정신수양을 위해 명상은 하지 않더라도 골프에 깊이 빠져보면 정신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사실은 그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저같이 심장이 작은 사람이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조금만 불안이 엄습하면 그날 스윙은 정말 형편없어지는 것을 보면 너무 쉽게 증명이 됩니다. 그러다, 실망감에 빠져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쳐보자, 공이야 지가 알아서 가겠지 하며 막 스윙을 하는 순간, 말로는 안 되는 멋진, 그날의 베스트 샷이 나옵니다. 또, 그날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자신 있게 스팟을 맞춘 드라이버가 엉뚱한 바운드로 숲으로 사라지는 현상은 어떻게 성명해야 하나요?
기적을 이루려 하면 기적은 사라진다는 말이 맞기는 한 모양입니다.
운동을 하면서 가볍게나마 영적 훈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더구나 그저 골프장에 나갈 수만 있다면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얻기 힘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필드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력은 충분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 골프에 집착이 깊은 것은 천성적으로 그런, 영적 공부에 대한 열망을 안고 사는 탓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골프처럼 인생과 비유가 되는 운동은 없는 듯합니다. 얼핏 보면 우리는 매번 골프 그 자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듯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골프에 몰입하다 보면 인생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됩니다.
맘이 통하는 동반자를 만나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함께 느끼며 호흡하면서 자연의 소리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다리던 집사람이 차를 몰고 나옵니다. 그리고 제 눈앞의 행복한 골퍼들도 인생을 공부하러 자리를 떠납니다. 좋은 공부 많이 하시고 오시길 기원합니다.
가벼운 회오리바람이 보도 위의 남은 낙엽을 대충 쓸어내 버리는 한국의 겨울날 아침입니다.
글. 에녹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