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유자광과 신분제 그리고 무오사화

지난 이야기
연산군은 대간들의 비판을 싫어하여 언론자유를 억압하고 대간들 길들이기 하느라 유자광을 이용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정치 감각이 뛰어난 연산군은 대간권력을 축소하는 도구로 무오사화를 일으킨 듯 합니다.

유자광은 누구인가?
즉위 후 4년동안 대간들과 대립한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 사건이 일어나자 왕권을 강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긴 듯 합니다. 유자광의 약점을 파악한 연산군은 대간들의 숙청을 위해 유자광을 이용합니다.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주역이다 라고 평하는 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연산군의 각본에 의해 유자광이 춤춘 사건이 무오사화 입니다. 왜냐하면 무오사화 후 유자광은 빈손이고 연산군은 자신이 원하던 왕권 강화를 구축합니다. 그러면 소득없는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에 대해 살펴봅시다.

유자광은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간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남을 음해하고 고변으로 영달을 누린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필자도 처음에 역사 공부 할때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유자광 재평가 논의가 있습니다. 세종 21년 1439년 태어난 유자광은 무오사화 당시 60세 였으나 한풀이 하듯 사림파 대간들을 수사합니다. 이렇듯 한 맺힌 설욕을 하는 유자광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유자광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요 바로 첩의 자식 즉 서자입니다. 그러나 유자광의 젊은 시절은 사림파가 정계 진출을 하기 전이라 양반이라는 신분은 없었고 양민과 천민 두 계급만 존재하던 시절 입니다. 물론 세종시절에도 서자는 차별을 받았으나 성종 시절보다 덜했죠 벼슬아치(양반) 아들 유자광은 갑사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하던 세조 13년 1467년 이시애 난이 일어납니다. 28세의 유자광은 출전 상소를 올려 세조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책을 묻는 세조에게 자신의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출전합니다. 3개월 후 이시애 난이 진압되자 유자광은 적개공신 1등에 임명되고 무관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정랑(정5품)에 임명됩니다.
그러나 대간들은 서자를 6조 낭관에 임명할 수 없다고 반대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유자광은 대간들과 악연을 맺게 됩니다. 이에 세조는 예조에 명하여 허통 (서자의 관리 임명을 허락하는 어명) 시킵니다. 하지만 유자광은 대간들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빌미로 고향 남원으로 내려갑니다.

*6조 낭관 : 6조의 실무책임자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통칭하는 용어. 그중에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하위직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서 요직으로 인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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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자광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효자 유자광은 상여를 아름답게 꾸며 모친의 마지막 길을 보냅니다. 대간들은 평민인 유자광의 어머니가 양반처럼 꽃상여로 단장했다고 탄핵 받습니다. 성종시절은 신분 차별이 조선후기 처럼 심하지 않던 시절이라 유자광은 심한 분노를 가집니다. 그외에도 서자라는 꼬리표는 늘 유자광의 걸림돌이 되어 대간들의 표적이 되고 또 소인이란 낙인이 찍힙니다.

사림파와 신분제도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명분론과 이념주의에 집착하는 학파였고 그러한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학풍을 계승한 사림파는 사람을 이분법적 논리로 구분합니다. 즉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과 대의 명분을 따르는 군자” 라는 등식인데 소인 이라는 낙인은 벼슬을 할 수 없는 가장 치욕적인 표현입니다. 성종 재위 당시 유자광 임사홍 두사람은 대간들에 의해 국가가 공인한 소인 취급을 당하고 유배생활을 합니다. 이들 두사람은 나중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라는 두번의 사화를 일으켜 수백명의 선비를 죽이는 주역이 됩니다. 아마 두사람은 대간들 전체를 원수로 여긴 듯 합니다.
또한 사림파는 인간의 신분을 양반 중인 평민 천민 4계급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신분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사람이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림파의 신분 구분에 의해 첫번째 희생자가 유자광인 듯 합니다. 본래 유교는 가부장적 사회이고 부계 혈통을 따르는데 유독 신분제도는 모계 혈통을 따릅니다. 이는 양반 숫자의 증가를 억제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사유 재산인 노비의 감소를 막고 더 나아가서 노비의 수를 늘려서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려는 의도 입니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의 아들 영응대군은 노비 숫자가 만명에 이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로 노비가 만명인지 세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그만큼 많다는 뜻 입니다.
이렇듯 성종 재위시 조선은 유교사회로 변화되는 변곡점이 됩니다. 세종 재위시 부분적인 유교사회로 변화가 시작되었고 성종 때 완성단계로 접어듭니다. 이러한 조선사회의 변화는 100년 동안 네번의 사화가 생기게 됩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겠으나 조선의 신분제도에 대해 조금 알아봅시다. 고려 공민왕,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치세에는 부계혈통에 의한 신분제도 였으며 서얼들을 많이 등용 했습니다. 대표적인 서자 출신은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 창덕궁과 종묘 그리고 조선왕릉을 설계한 박자청, 과학자 장영실 등은 전부 서자 출신입니다. 태종 시절부터 서자 등용에 대한 논란이 많았으나 태종은 “하늘이 사람을 낼때 천하게 만든 사람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태종은 기득권 층의 욕심을 간파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신분차별을 최소화 했습니다. 그러나 세종 시절에 대사헌 김효손은 상소를 올립니다 “만약 신분제도에 종부법을 (부계혈통 신분제도) 따르면 모든 노비는 평민과 혼인하여 신분 상승을 할 것이니 결국에는 노비가 사라지고 이는 신분제도에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김효손의 상소를 가납하여 세종대왕은 노비 종모법을 (모계혈통 신분제도) 시행합니다. 더 나아가 성종 시절에는 종모법을 강화하여 서자를 차별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은 유교 원칙에 의한 통치, 선비 위주의 유교 이념이 낳은 기현상 입니다.

왕권강화 그리고 사림파와 훈구파의 연합
다시 무오사화 이후로 돌아 갑시다. 성격이 잔인 하면서도 정치적 감각 하나는 뛰어난 연산군, 서자 출신의 유자광을 이용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대간권력을 꺽어 버립니다. 이제 왕권, 훈구파 대신, 사림파 대간은 권력의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연산군이 진정하고 군주의 길을 갔다면 더 나은 정치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더 강력한 왕권을 요구 했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욕망을 눈치챈 훈구파 대신들은 사림파 대간들이 괴멸되면 왕권에 대항하는 신권의 괴멸을 의미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훈구파 사림파의 연합전선이 구축됩니다.

박자청은 창덕궁, 종묘, 태조의 건원릉을 설계하고 완공했으며, 건원릉은 조선왕릉의 효시가 되어 후세 왕과 왕비의 능은 전부 건원릉을 모델로 했음. 박자청의 3대 작품인 창덕궁, 종묘, 조선왕릉은 전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박자청은 세계유일의 세계문화유산 3관왕이 됩니다. 이는 서자를 중용한 태종의 혜안이죠. 그러나 박자청 역시 서자의 차별과 사회에 대한 저항심리로 성격이 난폭하고 탐욕이 많아 선비들은 박자청을 소인으로 취급합니다.
*박자청 : 본래 내시 출신이나 건축에 조예가 있어 태종이 선공감으로 발탁합니다.

훈구파 대신들은 사림파 대간들이 전부 괴멸되면 왕권을 견제할 신권이 소멸될 것을 염려 했습니다. 즉 “순망치한”을 염려 했습니다. 이러한 신하들의 움직임은 연산군에 의해 간파되고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을 악용합니다. 비록 연산군의 어린 시절에 발생된 사건이나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 연산군 혼자 모를 수는 없죠. 진즉에 알았는데 때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성종이 연산군의 모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보낼 때 이세좌는 금부도사로 재직하고 있어서 사약을 가지고 갑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듯 연산군은 연회 석상에서 예조판서 이세좌에게 억지로 술을 먹입니다. 술을 못 마시는 이세좌는 술에 취해 연산군의 곤룡포에 술을 흘리게 됩니다. 이것을 빌미로 이세좌는 불경죄로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갑니다. 유배 4개월 후 연산군은 도량이 넓은 척 하며 이세좌를 복직 시킵니다. 그러다 홍귀달의 손녀 간택 단자 거부 사건이 발생하자 연산군은 “홍귀달은 불경함이 이세좌 같구나” 라며 두사람을 불경죄로 같이 처벌합니다. 이세좌의 중복 처벌이 있자 많은 사람들은 폐비 윤씨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게 됩니다. 갑자사화의 전주곡이 울릴 때 임사홍이 나타나서 연산군의 분노에 불을 지릅니다.
폐비윤씨 사건 당시에 어명으로 사약 배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세좌를 보고 부인은 통곡을 합니다. 이세좌 부인은 “장차 보위를 물려받을 세자 어머니 사약을 들고 갔으니 우리 후손들은 씨가 마르겠구나” 라고 했는데 그 예언은 적중합니다.

다음 이야기
연산군은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간신 임사홍 역시 사림파 대간들과 훈구파 대신들에게 받은 수모에 대하여 처절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른바 갑자사화의 발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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