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의 자살률이 OECD국가 중 최고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제 세상 모두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태어나면서부터 복합적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집에서는 가족의 일원으로 제 구실을 해야 하고, 사회에서는 또 사회의 구성원으로 주어진 일을 차질없이 처리해야 한다는 역할의 부담을 안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이런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부담때문이라면 왜 한국인만 그런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모든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데 유독 한국인들이 자살률이 많은 이유는 한국인이 그런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약골이기 때문인가요?
이런, 한국인이 약골이라니 세상이 놀랄 일입니다. 원인은 한국인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랍니다. 즉 한국의 사회는 너무 완벽한 인간을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들도 자신에게 너무 엄격합니다.
우리 사회는 실수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데 너그럽지 않습니다. ‘엄친아’라는 희한한 단어가 생겨나는 것처럼 “남들은 저런데 왜 너는 그렇게 못하는가”하며 너무 완벽함 그리고 우수함을 요구합니다. 그런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잘하던 운동선수가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성적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이 나서서 채근을 합니다.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도 그저 부족한 인간의 하나일뿐인데 대중은 완벽함을 요구하며 그들의 작은 실수를 마치 엄청난 범죄행위를 한 것처럼 몰아붙이는 현상을 흔히 보곤합니다.
죄없는 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너무 치열한 경쟁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모든 사람이 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생활합니다. 그 엄격한 잣대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살다보니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골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한국인은 너무 심각하게 공을 칩니다. 그냥 좋은 친구들과 대도시에서 만나기 힘든 푸른 그린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인데 거기에 스코어, 그것도 상대적인 비교를 우선시하는 게임을 하며 스스로 속을 뒤집는 라운딩을 하는 부류가 바로 한국인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골퍼들은 즐거워야 할 라운드를 앞두고는 팽팽한 긴장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임전무퇴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골프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서야 어찌 즐겁다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하긴 그런 자세 덕분에, 한국의 골퍼들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평소에도 그런 압박 속에서 라운딩을 하는 한국인이다 보니 실제 토너먼트에서도 별다른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뛰어날 수 밖에.
지난 주일, 교회 목사님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과 같은 사람, 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향기를 풍기면 많은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구애를 하면 관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큰 나무와 같아 그늘을 제공하고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양식을 베풉니다. 이 역시 그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는 사막의 선인장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는 곳부터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막에 그나마 그늘도 만들어 주지 못하고 그저 가시만 잔뜩있어 사람들이 다가서는 것을 막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홀로 서있습니다. 참 억울한 인생입니다. 이런 선인장같은 인생은 늘 스스로를 타박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저주합니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태어난 것인가요? 왜 나도 저들과 같이 꽃처럼 아름답고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남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냐고 원망하며 자신을 탓합니다.
그런데 이런 선인장은 정말 가치가 없을까요?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이제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남아있지 않습니다. 드디어 지쳐 쓰러진 나그네는 이제 이렇게 죽는구나 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깁니다. 가물해가는 그의 눈앞에 한 그루 선인장이 그와 같이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덩그러니 외롭게 서있습니다. 자신과 흡사한 운명의 그 선인장에 나그네는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래도 이런 물 한 모금 나오지 않는 매마른 사막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선인장이 부러워집니다. 어찌 너는 이런 메마른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가 가만히 물어 봅니다. 그때 선인장이 대답합니다. 그렇지요 이곳에는 물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일년에 한 두 번 비가 내릴 때 물을 저장해 두고 그 물을 증발되지 않도록 잎대신 가시로 몸을 치장하며 살고 있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메마른 사막이 유일한 우리의 안식처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아마도 그대가 필요한 물 한모금은 제가 줄 수 있을 지도 몰라요’.
그 말에 힘을 얻은 나그네는 선인장의 줄기를 잘라 즙을 마셔 몸에 생명수를 채워 넣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그 긴 사막을 걸어갑니다.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 그리고 너른 그늘과 풍요로운 열매를 맺어주는 삶만이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길 잃은 나그네에게 진정한 생명수를 전할 수 있는 존재는 향기로운 꽃도, 풍성한 열매의 나무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환경에서는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메마른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가고 또 그런 자신의 존재로 죽어가는 나그네에게 자신의 몸을 바쳐서 생명수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온몸에 가시가 달린 선인장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가치가 있는 것처럼 골프에도 역시 모든 골퍼가 다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골프 좀 못치면 어때요. 폼이 좀 엉성하면 어때요. 잘 못 치는 사람이 있어야 큰 나무 그늘처럼 멋지게 치는 사람이 빛나고, 폼이 엉성한 사람이 있어야 꽃처럼 예쁜 폼을 가진 사람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아닌가요?
골프 용어 중에 ‘나토’라는 것이 있습니다. NATO ; Not Attached To Outcome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뜻의 약자입니다.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골프를 즐기자는 의미에서 나온 말인 듯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반대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려 하면 할 수록 기적을 내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즉 잘하려하면 더욱 안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특히 골프라는 운동은 진지하게 맞서면 맞설 수록 어긋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잘 치려 말고 스코어를 잊어버리고 한번 쳐보라는 것이죠. 의외로 최고의 스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스코어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반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골프를 잘 못치는 사람들이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방법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골프가 갖고 있는 다른 요소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면 됩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자연과의 만남, 오랜 친구와의 환담, 바람의 속삭임, 그 바람이 안고 다가오는 풀내음, 이름 모를 열대의 꽃들과 새소리, 골프 스코어 카드가 아니라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운동이 골프입니다. 그러다보면 누군간 얘기 할 것입니다. 야 자네 오늘 참 잘 치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골프를 잘 치고 싶은 열성 골퍼 역시, 나토를 시도해보세요. 스코어카드를 찢어버리고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동반자와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새로 이사온 옆집 아이들의 극성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세요. 그리고 10 미터 퍼팅이 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적과 심심찮게 입스를 부르곤 하던 50센티 퍼팅이 아무렇지 않게 홀에 떨어지는 당연함을 경험해보세요.
역시,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다는 성현의 말씀이 새삼 가슴을 채워주며 뿌듯한 하루를 만나게 됩니다. / 글. 에녹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