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은 지배 계층인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문화였다. 당시 클래식 음악을 즐기던 귀족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로부터 들어온 음악만을 진정한 음악이라고 인정하고, 자국의 음악은 아마추어들의 음악이라고 폄하했다.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고유의 색깔이 담긴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강력한 소수’라고 불렸던 ‘러시아 5인조’이다.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다섯 남자. 강력한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와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알코올을 사랑했던 ‘무소르그스키’
루돌프 사슴코처럼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콧등의 소유자. 인터넷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누가봐도 심상치 않은 얼굴이다. 간질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사십대 중반에 세상을 등진 무소르그스키는 생존시 유명세를 떨친 음악가가 아니다. 러시아 남부 키에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너무 좋아해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음악은 취미로 해야 한다는 부모의 명령에 순응했다. 아니, 순응하는 것처럼 연기를 했던 걸까? 일단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사관생도복을 벗고 뛰쳐나와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독학. 이게 그의 아킬레스건이었을까? 체계적인 음악교육의 틀을 경험하지 못한 그의 음악은 독창적이기는 했지만 너무나 파격적이다 못해 기괴해서 대중이 쉽게 공감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혹평에 휘둘려 출판하지 못한 그의 작품이 수두룩 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현재까지 러시아 음악의 거장들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은 온전히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노고 덕택이다. 무소르그스키의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원곡들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적이고도 노련한 편곡 덕분에 세상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축일 전야> 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편곡한 <민둥산의 하룻밤>을 비교해 듣다보면 ‘와우’소리가 절로 나온다. 야생의, 날것의 느낌을 지닌 무소르그스키 필치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해 너무나도 세련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일요일이 더 바빴던 ‘보로딘’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국내 정상의 과학자로 활동했던 보로딘은 과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 ‘보로딘 반응’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음악가라는 직업은 귀족적인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일단 선택하면 부모와의 의절은 예약된 것이었다. 총명한 머리를 잘 살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착실히 공부한 후 전도유망한 유기화학계열의 전문가가 되었다. 약 10여 년동안 꾸준히 노력한 그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화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음악으로 창작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직업을 내던질 것인가? 쉽지 않았다. 타협점은 생업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작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 즉 주말이나 방학을 틈타 곡을 썼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로딘은 오로지 작곡만을 파고 들던 전문 음악쟁이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의 작품을 출판했다. 그럼에도 가장 빛나는 그의 작품은 20여 년이나 부여잡고 있었음에도 사망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던<이고르 공>이라는 오페라이다. 완성과 출판을 도와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공이 없었다면 짬짬이 시간을 내어 뜨거운 창작력을 불살랐던 보로딘의 야심작을 현재의 우리가 못 만날수도 있었겠다.
가르치는게 좋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
5인조 중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당연히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다. 하지만 다른 음악가들과 비슷한 이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해군학교를 졸업해 해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가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휴가 기간동안 클럽에서 사귀게 된 발라키레프 때문이었다. 후에 러시아 5인조의 리더가 된 발라키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다에 나가 있지 않는 동안 화성학과 작곡기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러시아 5인조에 합류하도록 유도한 사람 역시 발라키레프이다. 늦게시작해서인지 정말 날 새는 줄 몰랐나보다. 발라키레프의 도움으로 작곡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각고의 노력 끝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작곡과의 교수가 되고야 말았다. 요즘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 그는 주로 가르치는 일과 음악교육서적 집필에 몸을 던졌다. 덕분에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다음 세대에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걸출한 제자들을 육성해낼 수 있었다. 김연아 선수가 2009년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할 당시 안무곡으로 채택해 우리 귀에 익숙한 <셰헤라자데>가 명실상부 그의 대표곡이다.
음악보단 비평으로 승부한 ‘세자르 퀴’
오리지널 러시아인이었던 다른 네 명의 멤버와 달리 퀴는 프랑스계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퀴는 음악보다는 언변으로 그룹 안에서 제 몫을 톡톡히 했던 사람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 교수이자 축성 전문가였던 그는 러시아 5인조의 대변인 같은 존재였다. 다섯 명의 남자가 러시아 5인조라는 이름으로 뭉쳐 활동하는 이유, 그들의 사상과 비젼 등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고, 간혹 그들의 음악적 이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들이 나타나면 논리정연한 말빨로 그들을 설득하고 제압하는 것이 퀴의 일이었다. 작곡에 충실하기보다는 대외적으로 음악 평론가로서 더 활동을 많이 했던 퀴는 사실 5인조 사이에서 왕따였다고 한다. 다른 멤버들처럼 번듯한 곡을 써 작곡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부친이 프랑스계여서인지 그의 음악이 러시아 국민음악과 프랑스 살롱음악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기 때문이란다. 아니, 어쩌면 그가 순수 러시아 혈통이 아니어서 미운털이 박혔던게 아니었을까? 꽤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기록은 되어 있지만, 너튜브에서 그의 작품을 찾아 듣는 게 쉽지는 않다. 그리 성공을 거둔 작품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표곡을 하나 꼽는다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만화경>이 될 것 같다.
유일한 직업 음악인 ‘밀리 발라키레프’
다섯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음악을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카잔 대학 수학과에서 2학년을 마친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작곡공부를 시작했는데, 거기서 만난 당대 최고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러시아 고전음악의 대부)의 칭찬은 발라키레프를 전문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학다식하고 리더쉽이 뛰어났던 그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 멤버들에게 작곡기법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러시아 5인조 결성에 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발라키레프가 퀴를 만나면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이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거기에 마지막으로 보로딘까지 합류함으로써 비로소 완전체가 되어 활동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리더로서의 그의 역할은 음악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술에 쩔어 있던 무소르그스키를 찾아가 온전한 정신으로 곡을 쓰도록 독려해야 했다. 또한, 퀴가 나머지 멤버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을 때면 중립적인 태도로 상황이 악화되지 않게 힘써야 했다. 그 뿐인가! 학교수업과 연구로 눈코뜰새 없이 바빠 5인조와의 단체활동을 쉽게 할 수 없었던 보로딘의 빈 자리를 수시로 채워주어야 했다. 발라키레프가 코카서스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서인지 다분히 동양적인 색채를 띠는 <이슬라메이>는 엄청난 난이도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피아노곡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난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탁월한 테크닉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5인조 모임은 8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단한 결속력으로 수십년을 동고동락하는 앙상블 단체에 비교한다면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 역사상 이들이 남긴 흔적은 상당히 크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러시아의 민족적인 소울을 간직한 그들의 음악은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그 다음 세대를 강타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과 동유럽국가들이 개척한 국민주의 음악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16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가 여전히 기억하고 그들의 음악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러시아 5인조’는 진정 ‘강력한 소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