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정도전은 23세에 관직에 진출하여 9년간 개혁정책을 경험합니다. 다음 9년간은 유배생활을 하며 백성들의 참상을 경험합니다. 이성계를 만나고 9년간은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치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조선 건국 후 500년 사직의 기틀을 세우고 개국 6년 후 이방원에게 살해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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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당파싸움 권문세족 VS 신진사대부
우리나라 최초의 당파싸움은 고려말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두 세력의 충돌입니다. 물론 고려말 이전에도 권력투쟁이 있었지만 이념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집단 투쟁한 것은 고려말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두 세력이 처음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싸움을 당파 싸움이라 표현합니다. 무력에 의한 무신 정치는 당파싸움이 없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무사정치를 했고 독재정치를 했으니 당연히 당파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관이 정치를 하고 반대세력을 인정하고 반대의견을 표현할 언론의 자유가 어느정도 보장되어야 당파싸움이 가능 합니다. 그러나 반대를 할때 국가나 국민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고 당파의 이익과 기득권에 집착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본 우리는 당파싸움을 나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에 유교를 도입하고 조선시대에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웁니다. 또한 모순된 성리학적 이념 속에서 당파싸움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당파싸움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독식과 안하무인 권문세족
고려의 권문세족은 어떻게 형성 되었기에 나쁜 이미지만 나타날까요? 고려는 건국 후 안정을 찾으면서 전통적인 명문가 집안이 형성되는데 신라귀족 출신들이 많이 포함 됩니다. 고려의 상류층은 문음제도에 의해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진출하면서 관직을 독식하는 구조로 변질되어 갑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첫번째 권문세족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 바로 “무신란” 입니다. 권력을 독차지하고 부패해진 문관들을 비판하던 무관들이 권력을 차지한 후 하는 짓이 문관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무신정권 100년 동안에 또다른 권문세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나라 (몽고) 간섭기에는 부원배들이 몽고에 빌붙어 권력을 독점하고 권문세족화 합니다.
고려말에는 이렇게 세부류의 권력 층이 형성되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고 수확량의 70~80%를 차지합니다. 백성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고픔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토지를 뺏긴 백성들은 배고픔과 조세와 군역 등을 피하기 위해 권력가의 노비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증가된 노비는 조세와 병역의무가 없으므로 국가 세수를 감소 시키고 군인 감소로 이어져 국가 차원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한 권문세족들은 증가된 노비로 사병을 만듭니다. 사병이란 개인이 군대를 가진 것 이므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한 부류가 신진사대부 입니다.
고려말 부패한 권력에 도전장을 내민 신진사대부는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책을 수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진사대부 대부분은 이색학당 출신이라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결속력이 강합니다. 신진사대부 내부의 의견 차이도 존재 했으나 외부의 적 권문세족의 공격을 받자 강한 결속력을 보입니다.
1374년 공민왕이 서거하고 어린 우왕이 등극하자 이인임을 중심으로 권문세족은 단결합니다. 공민왕 시절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권문세족들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으니 폭풍이 예고된 것입니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 시절 권문세족 전체를 부패 세력으로 간주하고 척결하려 했지만 이제는 되려 보복을 당합니다. 이색학당 좌장격인 박상충이 고문치사 당하고 정도전과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갑니다. 이색학당 출신의 염흥방은 권력의 향배가 권문세족에게 기울자 신진사대부를 버리고 이인임의 수하가 되어 백성들 토지 강탈에 열을 올립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의 토지 강탈에 열을 올리던 염흥방은 일반 백성들 토지는 더 뺏을 것이 없자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장 세력의 토지를 탐냅니다. 염흥방이 신흥무장 중 “조반”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신진사대부 전체를 자극시켜 목숨을 건 투쟁으로 발전합니다.
이성계의 구원과 권문세족의 몰락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동원하여 전광석화 같은 과감한 작전으로 권문세족의 핵심세력 대부분을 죽이고 권문세족들은 몰락합니다. 곧 이어서 일어난 위화도 회군 후 일부 남아있던 권문세족들은 대부분이 신진사대부 세력으로 흡수됩니다. 14년간 권력을 독점한 이이임과 권문세족은 몰락하고 권력은 신진사대부에게 넘어 갑니다.
사라진 공공의 적 새로운 당파싸움의 대두
30년 넘게 치열한 싸움을 하던 두 세력 중 신진사대부가 승리하고 권문세족은 사라집니다. 반대파가 사라지면 당파싸움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말 최대 문제점 토지개혁의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려서 내부 충돌을 하던 신진사대부는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즉 당이 쪼개지는 분당사태가 발생합니다. 정도전과 조준 등 강경파는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강탈한 모든 토지를 국가가 회수하여 경작자인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며 또한 토지를 뺏긴 농민들이 굶주림과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평민으로 풀어주는 정책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온건개혁파는 적극 반대를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지개혁 문제로 충돌하던 중 이색은 현재의 토지 주인과 경작자 농민이 서로 반반씩 양보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는데 정도전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정도전은 아주 심한 표현을 하며 스승 이색의 중재안을 비판하는데 “도적질한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찾아주면서 도적과 합의해서 반반씩 나누는 법은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스승이 관계된 사건이지만 정도전은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색과 정도전은 사제지간이 아니라 정적으로 변합니다.정도전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200년 이상 누적된 적폐를 일시에 고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이상국가 건설을 계획했을 수 있습니다.
토지개혁은 정몽주와 조준의 중재로 강경파 주장을 80% 수용한 과전법이 시행됩니다. 원안보다 20% 후퇴 했으나 “이전보다 만배나 낫다”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춤을 추며 좋아했고 강경파는 백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습니다. 우리 역사에 드문 개혁정책의 성공입니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경제적 기득권을 상실한 구 귀족세력 등 온건파는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강경파의 역성혁명 조짐을 문제 삼아서 공론화합니다. 명분상 강경파는 고려의 역적이 되는데요 온건파의 명분론은 뜻 있는 고려 선비의 지지를 받아 수 많은 고려의 충신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강경개혁파를 역성혁명파라고 알고 있고 온건개혁파는 충절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부류로 갈라진 신진사대부
권문세족을 몰아낼 때 단결했던 개혁세력이 언제 협력 했냐는 듯이 싸우는데 명분론의 온건파 보다 힘을 가진 강경파가 우세합니다. 그러나 온건파의 정몽주는 마지막 승부 수를 던지는데 이성계의 낙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입니다. 정몽주는 온건파 대간들을 사주하여 정도전 조준 권근 윤소종 등을 탄핵하게 하고 공양왕에게 참수형을 요청하지만 보복이 두려운 공양왕은 그들을 귀양 보냅니다. 정몽주는 울면서 청합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전하의 옥좌를 지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도전에게 씌운 죄목이 “미천한 출신이 조정을 어지럽게 했다” 는 죄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참수형은 무리입니다. 정몽주의 승부 수를 본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 합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은 죽고 신진사대부 온건파도 사라집니다. 남은 온건파는 조선의 개국에 협조한 부류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떠나는 세 부류로 나뉩니다.
첫번째 부류는 더러운 세상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살다가 사라진 부류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문불출” 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두문동 72현,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척석 선생, 황희 정승의 스승 채미헌 전오륜 선생외 6명 등은 낙향 합니다.
두번째 부류는 생계를 위해 관직을 버리고 상업를 택한 경우인데 우리는 이들을 개성상인 혹은 송상이라 부릅니다. 선비들이 하는 장사라 신용과 회계 장부도 정확하게 처리합니다. 옛날에는 회계 장부를 치부책이라 불렀는데 송상들이 만든 장부를 송도 치부라고 하며 현대 회계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명성을 날린 송상들은 이렇게 탄생 했습니다.
세번째 부류는 산속으로 피신하여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에 정진합니다. 사라진 권문세족과는 다르게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100년간 성리학을 연구하여 세상에 나옵니다. 이들이 조선 중기 사림파인데 강경파의 후손인 훈구파와 다시 권력 싸움을 합니다. 사림이란 숲속의 선비라는 뜻입니다. 이들 사림파가 사색당파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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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
조선건국 후 정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당권 경쟁같은 파벌 싸움을 살펴 보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