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전부터 시작된 최초의 당파 싸움
고려의 신진사대부 VS 권문세족
지난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 군주 후보였던 소현세자. 400년 전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하였고 또한 조선의 병폐를 치유하고자 했던 소현세자 부부는 가족 전체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소현세자는 성리학에 함몰된 조선을 개방하고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보다 220년 앞선 시대의 선각자 소현세자 부부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당파싸움이 많을까?
우리나라는 왜 당파싸움이 많았을까? 라는 질문을 필자는 많이 받았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좀 어렵습니다. 또한 베트남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은 당파싸움 없이 조용한 정치를 했는데 우리만 당파 싸움으로 인해 정치 후진국 되었나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 했습니다. 정말로 이웃 나라들은 권력투쟁이 없었을까요?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대인 조선 시대의 정치문화가 현대 정치 문화의 뿌리가 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이는 필자의 평가가 아니라 외국 정치학자와 외국 언론의 시각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정치 환경 즉 사색당파가 형성된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보러 700년 전으로 가서 긴 시간 여행을 합시다.
고려의 개혁을 시도한 충선왕의 씨앗
고려 말 충선왕은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는 고려의 형편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충선왕은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1314년 연경(북경)에 만권당을 (만권의 책이 있는 집) 세우고 고려의 미래를 위해 학자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기대와 다르게 만권당은 고려를 망하게 했고 또한 당시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키는데 그 이유는 만권당이 성리학 수용의 산실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충선왕을 따라 북경에 도착한 백이정은 중국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이제현 박충좌 이곡 등에게 성리학을 전수합니다. 특히 이곡은 원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소원을 묻는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 공녀제도의 폐지를 건의하여 허락을 받은 일화는 유명합니다. 16세 ~ 20세 고려 처녀들을 징발한 공녀제도 때문에 공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15세 전 후로 출가시키는 조혼의 악습이 생겼던 고려시대의 고민을 해결한 이곡은 아들 이색에게 성리학을 전수시켰고, 이색은 이색학당을 열어 신진사대부를 양성합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수행한 신진사대부는 대부분 이색학당 출신입니다.
아버지 이곡과 스승 이제현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은 이색은 학당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박충좌 정몽주 길재 이숭인 하륜 정도전 조준 윤소종 권근 등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한 시대를 풍미한 기라성 같은 많은 학자들을 양성했습니다. 이들 이색학당 출신들은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고려 말 권문세족들과 정치적 대립을 했는데요 이들을 우리는 신진사대부라 부릅니다. 이러한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들과 권력을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요 이른바 당파 싸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나라 최초의 당파 싸움은 고려말 권문세족들과 신진사대부들의 싸움인데요, 권문세족들은 기득권층이며 신진사대부는 신흥개혁 세력입니다.
왜 권문세족과 신진사재부는 대립했는가?
권문세족들은 고려 무신정권과 몽고의 간섭기 200년을 거치면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원래 독재권력이 존재할 때와 국가 지도자의 통제력이 약화될 때 간신들이 더 설치는 법이죠. 고려말 권문세족이란 고려말 무신정권 즉 독재권력에 아부하여 형성된 무리들과 몽고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과 재물을 탐한 부원배, 그리고 고려 중기 이후 형성된 명문가 집안들을 합쳐서 부르는 용어가 권문세족입니다. 권문세족들의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향촌의 중소지주 층입니다. 신진사대부의 주축 세력은 이색학당 출신들인데, 이들은 고려말 과거를 거친 엘리트 층으로 공민왕 개혁정책에 동참하여 정치적 입지를 넓힌 경우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은 만권당을 세운 충선왕의 손자이고 충숙왕의 서자, 즉 몽골 출신의 왕비가 아닌 후궁 덕비 홍씨의 아들입니다. 젊은 시절 왕전(공민왕)은 어머니가 몽고 출신이 아니고 충숙왕의 셋째 아들이라 서열에 밀려 번번히 왕위 계승에 고배를 들었습니다. 가슴에 큰 뜻을 품었으나 좌절하며 살던 왕전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고려의 무능한 세명의 왕(충혜왕, 충정왕, 충목왕)을 차례로 폐위시킨 몽고는 왕전 (공민왕)을 등극시킵니다. 물론 공민왕의 아내 노국 공주와 장인의 도움도 받아서 등극한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은 등극 후 원나라의 간섭을 끊고 개혁 정책을 실시합니다.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공민왕은 부패의 온상 권문세족 제거에 신진사대부의 문신들과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장세력들을 적극 활용하여 개혁 정책을 수행합니다. 나중에 무장세력 중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신진사대부가 결합하여 조선을 건국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공민왕의 개혁과 죽음 그리고 정도전
공민왕 개혁정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몽고 세력의 축출과 자주성 확립, 둘째는 부패가 만연한 고려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은 세 부류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영과 이성계 등 신흥무장 세력과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 그리고 승려 출신 신돈입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고 지금은 고려의 기득권 층 권문세족들과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충돌 즉 당파싸움을 소개합니다.
고려의 개혁군주 공민왕은 암살당하고 만 9세의 어린 우왕이 1374년 고려 제 32대 국왕으로 등극합니다. 권문세족 출신의 대표 이인임은 공민왕의 암살 사건을 해결하고 어린 우왕을 대신하여 섭정이 됩니다. 이인임은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고 신진사대부를 경계하는데, 북원 (몽고로 쫓겨난 원나라) 외교를 반대하는 강경 친명파 정도전을 나주 거평부락으로 귀양을 보냅니다. 당시의 신진사대부 대부분은 이인임의 친 북원 외교를 반대하고 친명 외교를 주장했는데 정몽주와 정도전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권문세족들은 염흥방 임견미 도길부 등을 중심으로 토지 수탈에 열을 올립니다. 그들 중 염흥방은 이색학당 출신인데 권문세족과 투쟁에 회의를 느껴 이인임 휘하에 들어간 인물입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염흥방은 악랄하게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합니다. 힘 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거의 수탈했으나 아직도 배고픈 염흥방 일당은 중소 지주인 신진사대부들의 토지에도 손을 댑니다.
이에 격분한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들과 목숨을 건 승부를 벌이는데,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권문세족들과 싸운다고 명분을 내세울 수 없으니까 부패한 권문세족들로 부터 백성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똘똘 뭉칩니다. 바야흐로 첫번째 당파 싸움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신진사대부가 똘똘 뭉쳐 대항하자 권문세족들도 적잖게 놀란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머리 좋은 중산층의 재산은 뺏기가 좀 힘든 법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힘을 가진 권문세족이 명분을 가진 신진사대부 보다 유리하여 펼쳐집니다. 귀양 가거나 죽는 신진사대부가 많이 생깁니다.
이렇게 신진사대부가 많은 타격을 받고 있을 때 정도전은 나주의 귀양지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랭이로 알았던 백성들은 세상의 이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면서도 참고 사는 백성들을 본 정도전은 백성이 근본인 민본주의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민본정책으로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정도전은 귀양에서 풀린 후 이성계를 찾아갑니다.
개혁 의지에 불타는 정도전은 1385년 함주 이성계 군막으로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문과 무의 결합, 힘과 사상의 결합인 이 사건은 한국사에 큰 변곡점이 되어 조선 건국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시기도 절묘합니다. 즉 성인이 된 우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막고 임금의 권한을 찾고 싶어합니다. 타이밍을 포착한 정도전은 이성계가 최영의 신임을 얻도록 지원합니다.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두 세력의 싸움은 정도전의 승부수로 쉽게 결판이 납니다.
위화도 회군이 있던 1388년 초 이성계와 정도전은 최영 장군을 설득하여 이인임 일파의 처단을 결의합니다. 최영은 밤에 입궐하여 우왕의 재가를 받고 대기하던 이성계에게 계획의 실행을 지시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미리 준비한 계획대로 야밤에 2천여명의 정예부대를 보내 염흥방 임견미 도길부 등 이인임 일파를 도륙합니다. 이인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장에서 참살하고 가족들은 모두 돌을 매달아 임진강에 던집니다. 이 사건으로 권문세족들은 치명타를 맞고 급속하게 세력이 위축됩니다.
마지막 운명의 한 수는 위화도 회군입니다. 역사적인 사건 위화도 회군은 출전 후 현장 상황에 따라 부득이한 조치라고 볼 수 있으나 필자는 철저하게 준비된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진사대부는 개혁의 방향을 두고 의견이 달라서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분리됩니다. 외부의 적을 물리친 후 서로가 주도권 싸움을 하다가 다시 당이 쪼개지는 분당사태가 벌어지는 신진사대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봅시다.
다음 이야기
당파싸움 이야기의 줄거리만 쫓아가다 보니까 생략된 이야기가 많아서 다음 시간에는 [고려말 개혁을 시도 했으나 실패한 왕들 이야기]와 개혁의 아이콘,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