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의 근원
난데없는 화폐 개혁과 리디노미네이션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시절이 하 수상(殊常)할 때마다 숱하게 나왔던 주요한 경제 재료였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의 화폐개혁설과는 많이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잡은 정권이 가열차게 행하고 있는 적폐청산, 서민경제, 공정과 정의, 소득주도성장 등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확실한 큰 것 한 방(?)이 필요한 시점에 나오는 얘기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여러 유인이 있지만 직관적으로 말해서, 화폐개혁의 주목적은 딴 데 없고 ‘지하경제 양성화’가 가장 큰 목표다. 정권 연장을 노리는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만한 재료도 없다. 정부가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 그리고 국세청 세무조사 등 사정기관을 통한 소위 말하는 가진 자들의 재산은 얼추 파악되었고, 이젠 이를 바탕으로 좀 더 확실한 경제개혁 조치가 필요하다고 국민들은 보고 있다.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죄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화폐개혁은 전쟁 전후, 쿠데타나 혁명정부 등장, 급격한 경제 실정으로 돈의 가치가 형편없어졌을 때 시행하는 긴급한 제도다. 국회의 동의는 제도적으로 필수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숫자, 즉 거래단위에 ‘0’이 많아 거래가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다른 나라의 실례를 보면 이는 넌센스다.
10개 아세안 국가들 중에서 인도네시아나(1USD/15,000IDR) 루피화, 베트남(1USD/23,300VND) 동화의 경우 돈 좀 있는 사람들의 액면 재산은 거의 조(兆) 단위다. 그런데도 자국민이 0이 많아 불편하다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를 아세안 전문가의 시선으로도 보지를 못 했다. 과연 한국인들은 화폐에 0이 많아 거래가 불편하고 우리 돈의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는 국민들이 많다는 게 사실일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직업이 없어서, 장사가 안돼서, 그리고 사업이 신통치 않아서 절대적인 소득이 없는 게 현실 아닌가 싶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의미와 장점 및 단점
먼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의 정의를 보면, 화폐 단위를 조정하는 것으로 원화를 예로 1000원을 1원으로 하는 것이다. 화폐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조치를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소득이나 물가 등 국민경제의 실질 변수에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체감지수의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물가 변동 등 실질변수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리디노미네이션 실시 이유와 장점은 다음과 같다. 국민들의 일상 거래상 편의 제고 및 회계장부의 기장처리 간편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억제,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 제고, 부패 척결과 지하경제의 양성화, 세수증대 효과 등이다. 반면에 부작용도 당연히 따른다. 화폐단위 변경으로 인한 국민의 불안 심리 확산, 새로운 화폐 제조에 따른 비용, 부동산 투기 활성화, 신구(新舊) 화폐의 교환 및 컴퓨터 시스템 교환 등에 수반되는 비용이 많다는 것이 단점으로 꼽힌다.
화폐개혁 사례
역사적인 화폐개혁의 주요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2년 제정러시아는 당시 4년에 걸쳐 3번의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해 결과적으로 5억 구루블이 1 신루블로 낙착되었다. 독일의 경우 1923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물가가 전쟁 전의 1.3조 배에 이르렀을 당시 독일 마르크화의 0을 12개(1조) 떼어 내고 기존의 구(舊)마르크를 신(新)마르크로 개명하였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리디노미네이션을 했을 때 구화폐에서 0을 30개나 떼냈는데,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단다. 프랑스는 1960년대에 자국 통화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100대 1의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 바 있다. 금세기 들어서는 2005년 터키 정부가 화폐단위를 100만 분의 1로 낮추면서 화폐 명칭도 ‘리라’에서 ‘신리라’로 변경했다. 1조짜리 지폐로 계란 한 꾸러미도 겨우 살 정도의 짐바브웨는 2006년부터 최근까지 화폐단위를 1조 분의 1로 떨어뜨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고, 자국 화폐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미국 달러 등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주요 통화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덕분에 폭락세를 거듭하던 1 비트코인이 우리 돈 천만 원에 육박하고 있다.
가장 최근 화폐개혁을 실시한 국가는 세계 최대 민주주의 나라 인도다. 인도 정부는 자국 통화인 인도 루피화[INR]로 경이적인 실험에 나서면서 세계적인 관심 국가가 되었다. 인도중앙은행[RBI : Reserve Bank of India]이 지하경제 양성화 목적으로 2016년 11월 8일 화폐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500 및 1000루피[9000원 및 18000원 상당] 이상 고액지폐를 전격적으로 유통 금지시키고 신권으로 하루 2000루피 이하로 교환하였다. 1000루피 화는 아예 폐지하고 대신에 2000루피 화가 생겼다. 인도 시중은행 총 예치금이 100조 루피[1736조원 상당]로 고액권의 금융권 예치 규모만 5조 루피[87조원 상당]에 달했다. 궁극적으로 ‘화폐 폐지’라는 세상에 없던 정책을 시험 중이며, 주요국들도 인도 정부의 화폐정책 추이와 그 파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고액권 유통금지조치 이후 인도 증시는 5% 넘게 하락하고, 달러 對 인도 루피화 환율도 10% 가까이 폭등하였다.
국가재정과 화폐개혁 시사점
무역전쟁, 국가채무, 화폐개혁, 금리 인하, 외환시장 불안 등이 경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모두가 국가재정(나라살림)과 관련된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을 흔들 재료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정은 건전성이 생명이다. 국가는 영속성이 기본이고 그 바탕은 국부다. 재정 건전성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은 100%, 신흥국은 70% 이내면 재정이 건전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40%(2019년 39.5%)를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다. 경제학적인 이론은 없으나 EU협약 등에 근거하여 나온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최근 국가재정전략회에서 “정부가 국가채무비율을 40% 안팎에서 관리하는 근거가 뭐냐?”는 한마디에 난리가 났다.
참고로, 2018년 말 기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갚아야 할 국가채무가 681조원, 연금충당부채 등이 1000조원 상당으로 총 국가부채가 1683조원이다. 국민 1인당 약 3360만원씩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국가채무는 포함할 대상과 채무 성격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협의 개념은 중앙과 지방 정부의 현시적 채무를, 광의 개념은 협의 개념에다 공기업의 현시적 채무를, 가장 범위가 넓은 최광의 개념은 광의 개념에다 준정부기관, 그리고 모든 기관의 묵시적 채무(우발채무.충당금)까지 포함한다. 한국은 세 가지 기준에 따라 국가채무 비율이 협의 개념으로는 40%, 광의 개념으로는 70%, 최광의 개념으로는 140% 내외다. 34개 OECD 회원국 대비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하나 과도한 해외의존도와 남북분단현실 등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다.
화폐개혁의 효과 및 전망
이론적인 정당성을 떠나서 국가채무는 후세대에게 빚을 지는 것인 만큼 과다하게 운용돼서는 안 된다. 정책 당국자에 따라서 나오는 발언들이 서로 다르고 덩달아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과거의 사례에 비춰보면 화폐개혁은 전격적이었다.
정부에는 ‘정책’이 있다면 국민들에게는 ‘대책’이 있다는 말로 회자되면서 난데없는 금값(온스당 1350달러)과 외화(1달러에 1200원에 육박)값이 급등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화폐개혁의 최대 수혜처로 지목된 부동산 가격도 다시 들썩이고 있다. 소위 말해서 소규모개방경제의 취약성을 안고 있는 우리 경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도 매섭다.
화폐개혁으로 한국에서 서울 집 한 채 가격이 10억원에서 100만원이 되면 부동산 가격이 추가로 오를까 내릴까? 커피 한 잔 값 5000원이 5.0원으로 표기하면 더 사 먹을까 덜 사 먹을까? 극명하게 1달러에 1200원에서 1.20원으로 대미 달러 환율이 달라지면 달러를 가질까 원화를 선호할까? 정책은 정부가 시행하지만 그 판단은 오롯이 국민들의 몫이다.
화폐개혁은 그 어떤 경제정책보다 국민들의 관심이 크다. 지금은 생산·소비·투자·소득·고용 등이 일제히 감소하고, 재고와 실업이 증가하면서 기업이윤 또한 감소 추세며, 물가·주가·임금·이자율 등도 내림세로 반전하면서 완벽한 경기 하락국면이다. 따라서 경기가 안정되고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전제돼야 한다. 화폐개혁을 정권연장 수단이나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허울을 가지고 가진 자들의 호주머니를 털고자 하면 안 된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우리 원화가 기축통화(Key Currency)의 반열은 아니더라도 국력이 커져서 자연스럽게 강한 통화(환율하락)가 되어 환율이 네 자리수가 아닌 세 자리나 두 자리 숫자로 줄어들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준비하던 1970년대 초반 원/달러 환율은 250원대(현재 1190원대)였으며, 당시 일본 엔화는 300엔대(현재 105엔대)였다. 현 정부의 일등공신 촛불혁명, 화폐(통화)제도의 근간을 흔들라는 권한까진 주어지지 않았으며 지금의 시대 상황에 맞지도 않다고 본다. 그리고 정부 지도자가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며, 대다수 국민들은 믿지도 않는다. 대통령 임기는 5년 국회의원은 4년이지만 국가는 세세연연 이어져야 하고,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선조들과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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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환
칼럼니스트, 국제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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