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동서양의 시대별 고전을 맥락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서평 대장정에 나서는 필자의 원대했던 마음가짐을 연암 박지원을 빌려 말했다. 이후 서양으로 곧장 건너가 3천년전 인간의 위대한 서사시로 출발했다. 명예로운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를 일리아스를 통해 들여다 봤다. 오디세이아로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원시적인 인류의 물음을 찾아 나섰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마주한다.
2천5백년전, 전쟁하는 것이 인간의 생활이던 시대에 전쟁 병법서가 아니라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Historiae’ 를 평생에 걸쳐 집필했던 당시로서는 어이없는 한 사내가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서부터 인류의 살아있는 신경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옛날, 파피루스 더미가 자신의 온 방을 둘러 싸고 있다. 그 중간에서 묵묵히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써 내리는 어느 남자의 넓은 등판이 보인다. 끈으로 묶인 얇은 신발을 신고 그는 세상을 다녔다.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기억하고 메모했고 그 기억과 메모를 땀으로 되새겨 파피루스에 한 땀 한 땀 새기는 중이다. 그 모습이 인류 그 자체가 버티고 선 것 마냥 의젓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분명 그렇게 쓰여졌을 것이다. ‘역사’는 역사담론을 말하지 않는다. 현대 개념의 역사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사실과 진실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기술하는 자세가 논란이 되기 전에 이미 ‘역사’는 생겨났다. 역사를 기술한다는 생각 너머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다. 중요한 것은 기록한다는 것에 있다. 기록하면 남는다. 남으면 전해진다. 후대에 전해진 기록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사료史料가 된다. 비로소 역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 그는 처음부터 언급한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리스인이나 이방인이 이룩한 위대하고 놀라운 갖가지 업적, 특히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것이다.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동서문화사, P. 13)
그래서일까, ‘역사’는 헤로도토스가 그리스는 물론 유라시아, 북부 아프리카 일대를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이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며 들었던 이야기, 풍문과 소문도 사실처럼 빠짐없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사료의 의미로 남겨진 서양의 첫 기록이 된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그가 남긴 것은 사실만이 아니라 서양 문명에 ‘역사’라는 개념을 안겨준 첫 사람이기도 하다. 현대 개념의 ‘역사’의 시작을 알린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헤로도토스다.
영화 ‘300’을 기억하는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벌어졌던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헐리우드 식으로 각색한 영화다. 300명의 우람한 라케다이몬 (=스파르타) 병사들이 300만명의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는 내용이다. 말도 안 될 것 같은 스토리는 사실이며 이 사실은 기원전 420년경 쓰여진 ‘역사’ Historiae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파피루스에 촘촘하게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가 없었다면 알 수 없었던 사실이다. 말이 나왔으니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2,500년 전 사람의 음성으로 따라 가보자. 책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레오니다스는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만 친히 선발한 전통의 ‘300인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라이로 왔다.
페르시아의 척후병은 단지 성벽 앞쪽에 포진해 있는 부대의 동정만을 살필 수 있었다. 마침 그리스 병사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운동을 하거나 머리를 빗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척후병은 이 모습을 바라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 부대의 병력 수와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빠짐없이 조사한 뒤 무사히 되돌아갔다.
이 보고를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그 진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스파르타군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눈앞에 두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4일을 기다리며 그 동안 끊임없이 그리스 부대가 도주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5일째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철수하지 않자 노여움을 터뜨리며 메디아인과 키시아인 부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여 자기 앞으로 생포해 오라 명했다.
좁고 제한된 지역에서의 전투였고 페르시아군의 창은 그리스군의 창에 비해 짧았기 때문에 수적인 우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페르시아는 전사자가 다수에 이르렀는데 부대장들이 그들 뒤에서 닥치는 대로 채찍으로 내려치면서 앞으로 몰아댔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 떨어져 죽는 자도 적지 않았지만 산 채로 자기 동료들의 발에 짓밟혀 죽는 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은 자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레오니다스는 이 격전의 와중에서 실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졌고 다른 이름 있는 스파르타인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나는 용맹을 휘날린 이들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다. 나아가 전군 300명의 이름도 들어 알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많은 부분을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 등 전쟁의 모습에 할애하며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설명한다.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서술은 매우 사실적이다. 뿐만 아니다.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을 보면 그의 장도를 말해주는데 ‘동쪽으로 바빌론 또는 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남쪽으로는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시에네, 북쪽으로는 흑해, 우크라이나 남부 주변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놀랄 만한 대장정이다.’ 라고 했다. 특히,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구조, 역사의 기록 등 시대를 관통하며 축적된 사회적 지식이 한꺼번에 표출된 듯하다. 책에 소개된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한다. 당시 이집트의 장례 절차 중 하나였던 미라 만드는 법이다.
먼저 굽은 연장으로 콧구멍에서 뇌수를 꺼내는데 이때 약품도 주입한다. 그러고 나서 예리한 에티오피아 돌로 옆구리를 따라 절개하여 장부를 모두 꺼내고 꺼낸 장부는 야자유로 깨끗이 씻은 뒤 다시 갈아서 으깬 향료로 깨끗이 한다. 이어 맷돌에 간 순수한 몰약과 육계, 그리고 유향 이외의 향료를 복강에 쟁이고 봉합한다. 그러고 나서 이것을 천연 소다에 담가서 70일간 놓아둔다. 그 이상 담가 두어서는 안 된다. 70일이 지나면 유체를 씻어 고급 아마포를 잘라서 만든 붕대로 전신을 감고 그 위에 이집트인이 보통 아교 대신에 사용하는 고무를 바른다. 이 일이 끝나면 근친이 미라를 받아 사람 모양의 나무 상자에 넣고 상자를 닫은 뒤 장실 안의 벽 쪽에 똑바로 세워서 안치한다. 이상이 가장 비싼 미라를 만드는 방법이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말년 생을 쏟아 부어 ‘역사’를 썼다. ‘사실’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연민이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을 만들어 냈다. 그의 뿌리깊은 인간애가 없었다면 책은 완성될 수 없었음을 확신한다. 그 기록들이 지금까지 내려와 어두운 방에서 나와 교감하고 있는 사실은 더 경이롭다.
경이를 뒤로 하고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보자. ‘역사’를 읽는데 그치지 말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촉발된 나의 역사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기록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한 역사로서 존재할 수 있다. 오늘, 지금 당장 시간을 내어 우리 각자의 개인사個人史를 써 보는 건 어떤가. 나만의 역사를 가지는 것, 자신에게 역사가 쥐어 진다면 비로소 우리는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 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