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과 베트남의 인적교류는 400만명을 넘었고, 무역규모는 600억달러에 이르게 되어, 양국은 뗄래야 뗄수 없는 동반자의 관계로 거듭나고 있다.
지금이야 편하게 장사를 하고 대도시에서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세계와 연결되면서 다양한 경제, 사회활동을 볼 수 있지만 1990년대, 한국이 베트남에 진출한 초창기 때부터 활동하신 분들의 활약상은 진정한 개척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1993년 베트남에서 박사학위 취득을 위하여 남편을 따라 베트남 하노이와 인연을 맺은 김영신 원장은 비정부기구 NGO활동과 베트남 가사도우미와 한국인 고용주와의 갈등 해소를 위해, 어학교실을 열었다.
한국과 베트남 간의 커뮤니티의 연결을 시작으로 2005년 한베문화교류센터를 설립하여 양국의문화교류에 앞장서고 있는 김영신 원장.
오늘 우린 김영신 원장의 진솔한 베트남 이야기를듣고자 한다.
씬짜오베트남 독자들을 위해 한·베 문화교류센터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베문화교류센터는 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났어요. 다른 NGO들은 한국에서 설립하고 몸을 키운 다음에 베트남에 들어왔다면 우리 센터는 무명의 부부가 베트남에서 공부하면서, 이곳의 필요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 NGO입니다.
이렇게 베트남의 토양에서 탄생했기에 그 어떤 단체보다도 베트남화되어 있기에, 사람들 속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적시에 필요한 활동들을 할 수 있지요. 아마 한·베 관련 심포지움은 저희 센터가 물꼬를 트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베법률심포지움, 한베전통음악교류, 한베추석전시회, 한베과학심포지움, 한베국제결혼 심포지움, 한베말하기대회, 한베기독교세미나 등, 한국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일에는 늘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초기 1993년에 베트남에 오셨는데 그 때는 어떤 환경이었나요?
그때는 마치 조선시대인데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 사는 것 같았어요. 마실 물도 없었고, 수시로 정전이 되었고, 교통수단은 시클로와 자전거가 대부분이었고, 신호등은 호환끼엠 사거리에 하나 밖에 없었고, 자동차는 하루 종일 다녀도 한 대를 볼까 말까 했고, 가게는 한 평 정도의 공간에 봉지 설탕 2개, 봉지 가루 우유 2봉지, 이쁜이 비누 몇 개 올려 놓고 팔았었고 샴푸 같은 것도 없었어요.
거리는 전부 국방색 옷을 입고 국방색 철모를 쓴 남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여성들도 전부 무채색의 옷을 입었었고 아득한 옛날의 흑백 영화 속에 나오는 풍경이었습니다.
연중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서 체류하는 기간은 어떻게 되는지요?
저희는 주로 베트남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한국 구로동에 저희 센터 사무실이 있고, 한국 사무실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베트남에 일이 많아서 베트남에서 주로 거주하고 약 베트남 9 한국 1의 비율로 체류하고 있습니다.
지난 26년여간 한베문화교류센터 일을 하시면서 느낀 베트남 사람들의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고 또한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성’ 이죠. 한국인의 완성도와 베트남인의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베트남 사람은 일을 대충하는걸로 보이지만 베트남 사람은 그게 최선인거에요. 또 하나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베트남의 정문화’입니다. 한국은 사무적으로 일을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사무적으로 일을 하면 매우 힘들어하지요. 그래서 잘 놀아주어야 합니다.
변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베트남 문화는 ‘페를 끼치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인지를 하고 있다는 거에요. 전에는 아파트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도 그것이 이웃에게 폐가 된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은 조심하려고 한다는 거죠. 그래도 여전히 새벽에 공원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에어로빅을 하고 있긴하지만요.호호…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는 베트남인들의 성격입니다. 예전에는 길에서 싸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사고가 나도 ‘컴사오(괜찮아)’ 하면서 지나갔는데 요새는 무섭게 싸웁니다. 산업화가 되면서 어쩔 수 없는 변화인가 봅니다. 그래도 여전히 친절한 띵감(정감)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한베문화교류센터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저희 센터의 외형적 규모는 한국의 대형 NGO와 비교할 수 없지만, 내용면으로는 그 어떤 대형 NGO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베트남에 관련된 일은 그렇습니다. 모든 한·베 관련 사업은 저희가 많이 맡고 있습니다.
한·베 국제 결혼여성 사전 교육 교실, 한·베 국제결혼 여성들의 자조 모임 ‘코비나 여성시대’, 한 · 베가정 남성들을 위한 ‘우리 남편의 베트남 학교’ 한 · 베 2세들을 위한 ‘베트남어 교실’, 한 · 베가족을 위한 ‘엄마랑 아이랑 함께 하는 책 여행’ 등 그리고 저희 센터 산하에 ‘다애다문화학교’ 가 있어요.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위탁 받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 문화센터에서는 한국으로 이주하는 신부들을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생활 관련 단어들과 가족관계 호칭 등, 우리말을 먼저 가르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워 외로운 마음에 고향 친정집에 전화를 걸어 통화로 위안을 받다 보니, 전화비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는 것이 항상 한국인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큰 불만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한국 정부에서 아예 예비 신랑들에게 인터넷 전화를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의무화하고 교육시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한국에 이주한 베트남 여성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끔 끔찍한 기사가 날 때, 양국간의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는 문화교류센터의 계획이나 활동에 차질이 생기기도 할 것 같은데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제가 직접 사고 현장에 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부산에 시집간 여성이 7일만에 남편에게 살해되었을 때, 제가 껀터성에 직접 찾아가서 그 부모님을 만났어요. 정말 너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들의 슬픔에 같이 동참하여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엄마는 우리의 사과보다 당사자들의 사과를 받고 싶다는 거에요. 그 사위, 그 사위의 엄마, 이런 사람들이 직접 와서 사과를 하면 자기 속이 좀 풀어질 것 같다는 거죠. 이런 사건이 터지면 한.베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그러나 우리 센터는 오랫동안 지방성과 좋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고, 우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의 활동에는 다행히 지장이 없었습니다.
베트남 젊은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이타적이고, 공동체를 중요시 여기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정말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창의성과 자율성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특출한 젊은이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베트남의 교육이 획일적이다 보니 대체적으로 창의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인재를 양성하는 ‘번역클럽’과 봉사클럽인 ‘구슬땀’을 운영하고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시는지요?’
비용이 많이 들지요. 작년에는 한국으로 졸업여행도 갔다 왔습니다. 또한 매년 봄에는 ‘한마음 캠프’ 라고 해서 3박4일 동안 여행을 가요. 먹을 것도 잘 먹이지요. 매주 한국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매주 인문학 강의를 통해서 베트남의 미래 지도자감으로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사람을 키우지 않으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인걸 알기에 끝까지 붙들고 있습니다. 이 비용을 초기에는 하노이한인회와 한국기업인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지금은 인재양성에 뜻이 있는 한국교회와 크리스챤들, 그리고 이 동아리 출신 선배들이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베 문화교류센터와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한.베 문화교류센터는 베트남의 토양에서 탄생한 베트남 전문 NGO 입니다. 그래서 누구 보다도 베트남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가슴까지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기관입니다. 우리는 프로젝트의 완성만 추구하지 않고, 베트남 사람들 속에 따뜻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심는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필요(홍보)와 베트남 사람들의 필요(정감)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후원 기업의 홍보가 언론 매체를 통해서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해도, 혜택을 받는 베트남 사람들과 띵깜(정감)이 통하지 않으면 실패한 프로젝트입니다. 저희 센터는 이 두가지 모두를 충족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봤을 때 가장 어렵고 힘들었었던 얘기와, 특별히 기억나는 학생이 있으신가요?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때도 있었고, 괴소문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믿었던 직원의 등돌림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이야 외부의 조건이었기 때문에 제 힘으로는 불가항력이었지만, 악플과 배신은 저의 부덕의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에는 억울하고, 괘씸하고 뭐 그런 감정이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저에게 필요했던 시간들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제가 많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지금은 예전보다는 더 많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억나는 학생은 많지요. 특히 번역클럽 6기 Ngo Thanh Ha(오청하)라는 학생입니다. 하노이대 한국어과, 서울대 교육행정학 석사를 거쳐 호주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대학 교육학 박사가 된 학생입니다. 또한 번역클럽 6기에 Thuy라는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가끔씩 저희 부부에게 고급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우리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르겠다며 잊지 않고 저희 센터를 찾아올 때, 정말 보람을 느끼며 뿌듯합니다. 또 롯데에서 일하고 있는 짱도 멋진 제자이고, 신한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번역클럽 10기 Dung도 모두 사랑스런 제자입니다.
최접점에서 느끼는 베트남 사람들의 특성과 특히 우리 대한민국이 베트남과 가까이 지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보기에는 유연해 보여도 위기에 강한 민족입니다. 평소에는 단결이 잘 안되다가도 국가의 위기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무섭게 돌변하지요. 아시아에서 중국에 유일하게 큰소리 칠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습니다. 배짱이 두둑하지요. 그 점이 부럽습니다. 그런 베트남이 우리 한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많은 후원자가 있으시겠지만 최근 특별한 후원자를 만나신 걸로 아는데 그 사연 좀 부탁드립니다.
올 2월에 배달의 민족 김 봉진 대표를 만났습니다. 이미 호치민에 배달의 민족이 진출했는데 하노이 시장 진출로 방문했던 하노이에서 저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문화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저희 부부가 공저한 책을 선물했습니다. 이 분이 책을 비행기 안에서 다 읽고나서 한국 공항에 내리자 마자 저희 센터로 거금을 쾌척했어요. 정말 젊은 분이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는 성공하자 마자 100억 기부를 약속했고 그 약속을 1년 6개월 만에 지켰다는 것을 나중에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원처 중에 우리 센터 이름도 나와있었어요. 정말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끝으로 씬짜오 독자분들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씬짜오 베트남은 교민잡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입니다. 그러나 호치민에서 시작을 해서인지 하노이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었는데 올해 1월부터 하노이판이 발간되어 매우 고무적입니다. 하노이 교민사회도 점점 확대되고 있어서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소식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고 이에 씬짜오 베트남이 함께 동참하여, 교민사회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