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베트남 영토에는 어떠한 민족이 국가와 사회를 이루고 살았을까요 ? 베트남은 고대의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베트남 영토내 출토된 유물을 통한 역사적 해석을 하기도 하고 인근 국가 즉 중국의 기록을 참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과 비슷합니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고대의 역사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은 하지만 모두 사라지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는 없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둘 다 중세시대에 들어와서 기록된 역사자료들을 통해서 고대사를 해석합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이 아니라 짧게는 천년 길게는 수 천년 이상 세월이 흐른 후의 기록입니다. 역사학계는 당대의 기록을 가장 신빙성이 있는 기록으로 인정하고 이를 1차 사료라고 합니다. 1차 사료의 기록에 더하여 유물이 출토되면 더 정확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비슷한 시기에 (청동기시대) 한국에는 조선(고조선) 이라는 국가, 베트남에는 반랑(Văn Lang)왕국이 건국 되었는데 이들은 토착세력에 의한 국가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민족의 혈통을 이야기 할 때 흔히 단일민족 이라고 말하는데 한국과 베트남 모두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고조선과 반랑왕국이 세워질 당시에는 어느정도 단일민족의 혈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을 하는 습성을 가져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합쳐지고 나눠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이동”이 인류 문명을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베트남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는 “대월사기” 인데 이는 몽고가 베트남을 침략하던 13세기 후반입니다. 우리는 고려시대 12세기 중반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가 간행 되었으나 민족의 기원설 고조선 역사는 없습니다. 삼국사기 출판 백년이 조금 넘게 세월이 흐른 후 일연이 고조선의 역사를 포함한 “삼국유사”를 저술했는데 13세기 후반입니다. 베트남이 “사기전서”를 만든 시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전체 역사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몽고의 침략으로 암울하던 시대에 자기 민족의 역사가 출판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고 희망을 주는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2,100년 전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한국과 베트남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열전”과 “남월열전” 입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편” 120권을 저술했는데 한국과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는 각각 한권씩 따로 기록했으며, 또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 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편에 나오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 기록이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역사서 입니다. 사마천이 “조선열전”과 “남월열전”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이유는 두 나라가 중국과 연관성이 많았고 민족의 이동이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중국과 1400km의 국경을 맞대고 있고 베트남은 중국과 1300km의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교류와 충돌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과 베트남의 민족 이동에 대해 살펴봅시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월 나라는 지금의 베트남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 정답은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월족과 베트남의 Việt족은 (kinh족)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학설이 다수설 입니다.
춘추 전국시대 당시 강남은 개간이 안된 황무지 혹은 늪지대로 중국 중원 지역에서는 강남을 미개인 혹은 오랑캐들이 사는 지역으로 치부하여 “형만” 또는 “남만”이라 불렀습니다.
춘추시대 강남 지역의 대표적인 나라는 초 나라와 월 나라인데 두 나라 모두 처음에는 주 왕실의 분봉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성장해서 중국 중원 국가들 보다 국력이 더 강해지자 주 왕실은 어쩔 수 없어서 초 나라와 월 나라를 국가로 승인한 경우입니다. 초기에는 초·월 두 나라가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협력했으나,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점령하고 힘이 강해지자 두 나라는 서로 충돌합니다. 특히 오 월 대전에서 월 나라가 승리하자 초 나라는 월 나라를 견제하고 잦은 충돌을 하게됩니다.
BC 307년 제 나라와 초 나라 두 나라의 협공을 받은 월 나라가 멸망하고 월 나라 유민들 중 일부는 남하를 시작합니다. 현재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광서성과 운남성으로 이동한 월족을 남월이라 불렀습니다. 고대 베트남의 국가명 남월은 이러한 월족들의 남하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현재 중국의 광서성은 중국 소수민족인 “장족” 자치구인데 이들이 바로 과거 남월(南越)이라 불렸던 민족입니다. 즉 월족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산다는 뜻으로 남월이라 불렀습니다. 아직까지 장족들은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며 1,700만명 정도 살고있고, 중국 소수민족 중 최대의 인구를 지닌 소수민족 입니다. 월족들 중에 이동하지 않고 남아있던 월족들은 몇 백년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어 한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운남성과 광서성 중간 지대의 북쪽에는 묘족들이 600만명 정도 살고 있는데 이들 역시 월 나라 유민들이 이동하여 온 월족들인데 민월의 일부입니다. 현재 묘족들은 한족들에게 가장 저항 의식이 강한 소수 민족입니다. 월 나라의 국민성을 닮은 듯 합니다.
베트남 고대사를 정리하면 반랑왕국이 청동기시대에 건국됩니다. 그리고 반랑왕국이 국가의 형태를 갖춘 시기는 오 월 대전이 치열하던 BC 5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반랑왕국은 백월족(百越族 )이 (Lạc Việt) 세운 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흥붕(Hưng Vương, 반랑 왕국의 왕)은 락후(큰 부락의 장) 락장(작은 부락의 장) 이라고 부르는 지배계층인 촌장들을 통한 간접 통치를 했습니다. 피지배 계층은 백월족과 남방계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도읍지 호아르(Hoa Lư)는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적당한 농경지가 있어서 고대의 수도로 적합한 지역입니다. 또한 인근 지역의 짱안(Tràng An), 땀꼭(Tam Cốc)은 경치가 절경이라 아름다운 풍경도 도읍지 선정에 한 몫 했을 것 같네요.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홍강델타의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 반랑왕국의 경제적 기반은 충실한 편입니다. 그러나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힘이 없으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고대 베트남 풍속 중 우리에게 익숙한 “형사취수” 제도와 비슷한 “형제연혼(형제가 죽으면 그 부인을 취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일부다처제 풍속일 수도 있으나 죽은 형제의 남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풍속이라고 여겨집니다.
반랑왕국의 영역은 판시팡 산맥을 경계로 한다는 설과 중국 강남지역의 일부를 (광서성과 운남성 일대) 포함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BC 4세기 후반 월 나라가 멸망하고 월족들의 이주로 인해 “남월”이라는 명칭이 생겨서 생겨난 학자들의 논쟁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남월이 생겨서 베트남의 토착세월인 백월 (Lạc Việt)과 합쳐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실 고대 국가는 국경의 개념이 현대와 많이 달라서 경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반랑왕국 멸망 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중국에서 이주한 남월족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또한 남월족의 저항정신 때문에 향후 중국의 침략에 시달리게 됩니다.
| 다음 이야기 |
베트남의 토착세력인 백월족과 남방계 민족들이 세운 평화로운 반랑(Văn Lang)왕국은 진시황제의 중국통일과 연이어 한족 국가인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격동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다음호에서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