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수필에서 열 개의 아름다운 우리 말을 꼽은 적이 있다.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김수영이 꼽은 우리 말에는 컴퓨터 화면에 단어를 쓰면 빨간 밑줄이 그이는 말도 있다. 이미 표준어 밖으로 벗어난 옛말이라는 뜻일 텐데 한번에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는 말들이 많고 대량의 언어학 규범이 내장된 PC조차도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얘기다. 시인 김수영과 우리 사이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살던 시대와 내가 사는 시대 사이를 흐르는 언어 조류가 눈에 띄게 빠르다는 말이겠다. 이 거센 조류에 우리의 언어, 나 자신의 단어를 꼽아 죽방멸치처럼 가두고 싶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일었다.
오늘, 우리말 아름다운 나만의 단어 중 제일 윗자리는 오늘이다. 오늘은 현대의 시간 단위로 치자면 자정에서 자정까지의 24시간이다. 사전을 뒤적여 보니 오늘은 ‘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날 ‘ 이며 비슷한 말로 ‘ 금일 ‘ 이 있다 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오늘이므로 오늘은 그대와 나,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시공간적 최대공약수다.
오늘이 거듭되면 매일이 되고 매일이 누적되면 삶이 된다. 그러므로 내 삶은 나의 오늘로부터 시작되고 내가 삶을 마치는 그 어느 날도 바로 오늘이 될 테다. 어떤 일을 언제 하든 그 시점은 오늘이 될 것이란 말이겠다. 그러니 뭔가를 시작하려면 오늘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해보려 마음먹기에는 오늘이 가장 좋다. 마음만 먹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실천 또한 바로 ‘ 오늘 ‘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켜켜이 쌓인 실천은 언젠가의 오늘이 반갑게 화답할 터인데 그때 우리는 삶을 상대로 보기 좋게 승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에게 일갈하는 스스로의 메시지다.
어찌 되었든 ‘ 오늘 ‘ 이라는 말은 꿈틀대는 모든 것들에게 존재한다는 동사를 수여하는 주어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오늘이 아름다운 가장 큰 이유다.
오늘이 낳은 아들이 지금이다. 지금은 늘 오늘을 따르고 대변한다. 둘은 모든 게 닮아서 서로를 좋아하고 같은 이유로 모든 게 닮았기로 반목하기도 한다. 지금이 틀어지면 오늘도 허송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말을 지금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게 되면 삶에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배어난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말은 오늘의 가장 큰 축복이니 ‘지금의 정신’이 없다면 꿈도 오늘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조금의 두려움과 초조함은 오늘과 지금을 사는 스피릿이다. 오늘은 바로 그 스피릿으로 내일을 추동하고 삶을 ‘잠재적 사형수’의 정체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확장하면 우리가 그렇게 비현실적이라 여기는 꿈과 연결된다. 오늘을 잃으면 지금을 잃는 것이다. 그 둘을 한꺼번에 잃는다는 말은 결국 꿈을 삶에서 내려 놓아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된다.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이 그의 저서에서 토로했던 두려움은 곧 지금의 정신을 잃었을 때의 자괴였다.
“가끔 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그 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 ‘ 들이 있게 마련이다. 종종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지금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두려움은 서서히 옥죄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계속 책을 쓰도록 했고, 계속 읽게 했으며,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 p.185)
오늘이라는 단어는 ‘늘’이라는 항상성을 품고 있다. 그 항상성에 ‘오!’라는 감탄이 지루한 일상을 깨뜨린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리멸렬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 삶이 흔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서 오늘도 흔적의 흔적으로 끝날 테지만 흔적조차 되지 못하는 바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하여 죽음에 봉사하는 케로베로스*와 같지만 ‘늘’이라는 항상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게는 영원이라는 뽕을 맞힌다. 그 뽕을 주사하고 바로 지금의 소중함을 삼켜버리는 건 순간이라서 오늘은 순식간에 지나가게 된다. 우리가 매일 발버둥 치며 사는 이유는 오늘을 허송해도 내일이 올 거라는 뽕맛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한 반항일지 모른다.
오늘을 ‘늘’이라는 허무의 뽕맛에 헌납 할지, 아니면 ‘오’하며 살아있음을 감탄하는 데 쓰는지는 그래서 오로지 우리,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한번뿐인 인생을 허투루야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을 놓치면 삶을 놓치는 것이니 아무리 작은 시간의 영토라 할지라도 나만의 멋진 오늘을 만들어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소명이다. 비록 흔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 케로베로스: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의 신 하데스의 충직한 개. 머리가 셋 달린 괴물로 표현되기도 하며 지하세계의 관문을 지킨다.
장재용
작가, 산악인, 경영혁신가 / E-mail: dauac97@naver.com 다음브런치: brunch.co.kr/@dauac#articles 블로그: blog.naver.com/dauac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