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전설이 된 미녀 서시와 관련된 고사성어
| 와신상담과 서시의 지난 내용 |
복수의 화신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 하던중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를 만나게 됩니다. BC 506년 저라산 기슭에서 중국 최고의 미인 서시가 태어나던 해, 오자서와 손무는 초 나라 정벌에 나섭니다. 초 나라 정벌에 성공한 손무는 전쟁이 주는 잔혹성에 병법서를 저술한 자신을 뉘우치며 산속으로 은둔합니다. 복수를 끝낸 오자서는 오ㆍ월의 30년 전쟁으로 새로운 복수의 화신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월왕 구천입니다. 오 나라의 침공으로 망해가던 초 나라를 도와 오나라의 배후를 공격한 월 나라는 서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30년간 계속합니다.
초 나라에서 회군한 오왕 합려는 사촌 동생 부개의 반란을 해결하고, 오나라를 칩입했던 월왕 윤상은 오 나라 주력 부대와의 전투를 피해 월 나라로 회군합니다. 하지만 오왕 합려는 월 나라와 여러번 전쟁을 하였기 때문에 월 나라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초 나라와의 오랜 전쟁과 부개의 반란으로 지친 군대를 쉬게하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월 나라를 공격할 기회만 노리던 오왕 합려는 BC 497년 월왕 윤상이 죽자 월 나라를 침입합니다. 그러나 월왕 윤상의 아들인 23세의 젊은 구천은 범려와 문종의 보필을 받아 오 나라 군대를 물리칩니다. 사형수를 이용한 구천의 전술에 어이없이 당한 합려는 화살을 맞고 상처가 덧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임종을 맞이한 오왕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월 나라에 복수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오나라 25대 군주로 등극한 부차는 월왕 구천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으려고 3년간 와신하면서 (장작 위에서 잠을 자는 것) 복수를 다짐합니다. 바야흐로 와신상담의 시작입니다.
오왕 부차의 뜻을 받들어 오자서는 군대를 조련하고 군수 물자를 준비하여 전쟁을 대비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실수 도움을 받아야 기회가 무르익 듯이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의 전쟁 준비 소식을 듣고 오 나라를 선제공격 합니다. 당시 월 나라 책사 범려는 오 나라 침공을 반대했으나, 지난 전쟁에서 기습 공격의 효과를 맛본 구천은 범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 나라를 침공합니다. 오자서는 월 나라의 선제 공격을 예상하고 대비해 진격하는 월왕 구천을 기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27세의 젊은 월왕 구천은 범려의 계략에 따라 항복을 하고 오왕 부차에게 노예로 살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오자서 자신이 복수의 화신이라 구천의 거짓 항복을 간파하고 구천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범려 또한 백비를 충동질 하여 구천의 목숨을 구합니다.
월왕 구천의 항복을 권유한 범려는 고민이 많습니다. 오자서의 존재가 넘기 힘든 난관인데 범려는 백비와 부차의 성격을 파악하고 승부수를 띄웁니다.
당시 오자서는 실력도 출중하고 강직한 성품이며 오 나라의 외치와 내무를 장악한 행인 벼슬을 하고 있었죠. 반면에 백비는 오자서의 추천으로 장관급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항상 오자서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범려는 백비의 탐욕을 파악하고 보석과 미녀 8명을 백비에게 보냅니다. 당시 오 나라 조정은 구천의 항복을 두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오자서는 “월왕 구천은 독한 성격이라 굴욕을 참고 도광양회 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범려의 뇌물을 받은 백비는 범려의 편지 내용을 자신의 말처럼 위장하여 주장합니다 .”월 나라를 멸망시킬 수는 있으나 구천이 죽기로 저항하면 우리 피해도 크고 또한 대왕께서 패자의 꿈이 있다면 구천을 종으로 삼아 살려 준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대왕의 덕에 감복할 것입니다.” 이에 오왕 부차는 “구천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일단은 구천의 행동을 지켜보자” 라며 범려의 계책에 넘어갑니다. 등소평이 사용하여 유명해진 “도광양회” 라는 고사성서는 2500년 전 범려의 계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렇게 오ㆍ월의 3차 대전은 3년간 와신한 부차의 승리로 끝납니다.
항복한 구천은 자신이 죽게 만든 오왕 합려의 무덤을 지키며 마굿간 청소를 하게 됩니다. 범려는 월 나라 내정을 문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구천을 따라가서 구천을 살리기 위한 계책을 세웁니다. 백비는 수시로 제공하는 범려의 뇌물을 받고 범려가 요구하는 것을 부차에게 전달합니다.
구천은 수 없이 많은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마다 범려는 계책을 세워 구천을 구합니다.
구천의 노예 생활 3년이 지나서 오왕 부차는 병으로 눕자 범려는 기회라 느끼고 구천에게 “부차의 대변을 먹으면 우리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부차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나도 일국의 왕 이거늘 어찌 그런 치욕을 강요하는가” 합니다. 범려는 “주군께 욕보인 신의 죄는 나중에 받겠으나 지금은 살아서 돌아가셔야 치욕도 갚을 수 있습니다”
월왕 구천은 범려의 계책대로 오왕 부차를 찾아가서 병세를 살펴볼 것을 청합니다. 부차의 병세를 살피던 구천은 부차의 대변을 요구하더니 손으로 변을 찍어 맛을 봅니다. “대왕께서는 불편한 말을 많이 들어서 화기가 장을 침범 했는데 대변의 맛이 시고 쓰면 나을 것이고 대변에 단맛이 있으면 회복이 힘듭니다. 다행히도 대왕의 변은 쓴맛이 많아 쾌차하실 것입니다” 범려의 계교대로 말한 구천은 부차에게 감동을 줍니다.
범려는 부차가 오자서의 충간에 마음이 상해서 병이 난 것을 알고 구천을 보내 말한 것입니다. 구천의 말에 용기를 얻은 부차는 완쾌하고 구천의 석방을 논의하게 합니다. 구천의 석방과 사형 중 하나를 선택하는 3일의 시간동안 구천은 오 나라 궁궐 뜰에 엎드려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그때 범려는 구천을 진정시킵니다. “백비와 부차는 오자서를 견제 하고 있고 부차의 성격이 소인배라 우유부단 합니다. 결코 부차는 주군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구천의 마음은 너무 불안했죠. 드디어 부차는 구천의 석방을 결정하고 월 나라로 돌려 보냅니다. 오자서는 한탄을 합니다 “나도 복수에 불타서 20년 살았건만 일국의 왕 구천은 오죽하랴. 석방 하려거든 치욕을 주지 말든지, 치욕을 안겨 주었으면 죽여야 하거늘 구천이 월 나라로 돌아가면 이제 오 나라에는 무서운 광풍이 몰아 치겠구나”
구천의 석방이 결정되자 구천은 부차와 작별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 합니다. 구천의 행동을 본 오자서는 “구천은 구밀복검을 할 수 있는 무서운 사람이다. 어찌 부차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라며 한탄을 합니다. 아마도 오자서는 고사성어 만들기 천재인 것 같습니다.
구천에 대한 오자서의 인물평은 아주 정확하여 같이 있던 범려도 감탄을 합니다. 나중에 뜻을 이룬 후 범려는 구천의 곁에 있지 않고 제 나라로 간 이유 중 오자서의 구천에 대한 평가도 참조 되었을 듯 합니다.
3년간 노예 생활을 한 구천은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9년간 구천은 쓴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심을 키워갑니다. 행정의 달인 문종은 월 나라 내정을 안정시키고 범려는 오나라를 없애는 계책을 세웁니다. 명궁 진음의 도움을 받아 명사수를 기르고 월녀라는 검술의 대가에게 군사조련을 부탁합니다. 또한 월 나라 전역을 돌며 부차에게 보낼 미녀를 구합니다. 야사에서는 범려가 미인을 구하던 중 저라산 기슭에서 서시를 만났고 첫눈에 반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현실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선발된 200명의 미녀 중 범려는 서시와 정단 두명을 선발하여 3년간 교육 시키는데 나이든 궁녀들은 노래와 춤, 악기, 남자의 마음을 잡는 말과 행동 등을 가르치고 범려는 학문과 (경전과 시) 책략 등을 가르칩니다. 15살 서시는 대단히 총명하여 범려는 감탄을 합니다. 만약 야사의 내용대로 범려와 서시의 사랑이 사실이라면 범려가 서시를 교육시킨 3년, 이때 서로 애틋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서시는 15세의 어린 소녀였고 범려는 45세의 장년이었습니다.
드디어 3년의 교육이 끝나고 서시와 정단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는데 오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단은 경성지미이므로 대왕께서 취하셔도 조금 곤란을 겪을 뿐이나, 서시는 경국지색이라 만일 대왕께서 취하시면 나라가 기울어질 것입니다” 오자서는 경성지미 경국지색 두개의 고사성어를 또 만들었네요.
오왕 부차는 서시와 정단 두 미녀와 함께 노느라 정사도 멀리 합니다. 서시에게 기울어지는 부차의 마음 때문에 정단은 화병이 나서 앓다가 죽습니다. 오나라에 도착 2년 만에 죽은 정단은 20세 꽃다운 나이였죠. 백비는 오자서를 모함하고 서시의 베개머리 송사가 힘을 발휘하여 BC 484년 부차는 오자서에게 칼을 보냅니다. 당시 관행은 왕이 직접 칼을 주면 상을 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칼을 주면 자결하라는 뜻 입니다. 칼을 받은 오자서는 오왕의 사자에게 말합니다. “슬프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망치는데 충신을 죽이는가. 나는 그대 부친을 패자로 만들었고 여러 공자들 중 그대를 즉위시켰다. 그대는 나라의 반을 내게 준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그런 나를 의심하고 죽이니 이제 오나라에는 범려를 당할 사람이 없어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어라 부차의 관을 짤때 쓸 나무다. 그리고 내 눈알을 빼서 동문에 걸어라 원 나라가 군대가 오는 것을 지켜보겠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목을 성루에 효수하고 몸통은 자루에 담아 장강에 (양자강) 던집니다. 백성들이 오자서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줍니다. 산 기슭에 오자서의 사당을 세우고 산 이름을 “서산”이라 고쳐 부릅니다.
| 다음이야기 |
다음호에는 삼일절 100주년 특집이 나갑니다. 우리민족의 평화적 저항, 전세계의 귀감이 되어 중국의 5ㆍ4 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운동의 효시가 된 삼일운동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전 종 길 /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주)하나로 축산 대표 /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