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고 난 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점심에는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아이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루 종일 비슷한 일과를 하다 보니 종일 반복되는 일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러하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수요일에 만나자 약속해 놓고 오늘이 화요일인 줄…. 아차!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내 기억력의 저하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지경이 되었나 싶어 난감하기도 하다. 예전 같으면 내 기억이 무조건 맞다고 빡빡 우겨서 남편한테 이기려했겠지만, 이제는 우기지도, 이기지도 못하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기억력 저하에 좀 슬퍼지기까지 한다.
올 초 일요일 새벽 어느 날이었다. 4살 아들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처음에는 응가가 마려운가보다 하고 응가하면 되지 했다. 응가가 안 나온단다. 그럼 좀 있다 낫겠지 하면서 ‘엄마손은 약손’마사지를 해 줬는데, 아이는 여전히 불편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3시쯤, 아이 배를 만져보다가 깜짝 놀랐다. 마치 임산부의 배마냥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게 아닌가. 뒤척이며 잠 못드는 아들놈 때문에 나도 못 잔다며 짜증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는데, 배를 만져보자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다. 이건 무슨 일인가. 일요일 새벽 3시 어느 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급하게 수술이라도 해야 하면 어떡하지? 순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은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자는 남편을 얼른 깨웠다.
” 어느 병원으로 가야되노? 이 새벽에 문 연 병원이 있나? FV응급실? 패밀리 메디컬? 어디? ”
“나도 뭘 아나. 내한테 물어보면 우짜노.”하는 순간, 니동 하이 라는 병원이 떠올랐다.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일요일 새벽에 응급진료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심지어 한번도 진료를 받아본 병원이 아니지만, 이 시간에 소아과 진료를 볼 수 있는 곳은 거기일 거라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택시를 타고 “디 벤빈 니동 하이”를 외치며, 만삭처럼 배가 부풀어있는 아들과 새벽 난리통에 잠이 깬 딸과 아빠 우리 4식구가 모두 출동했다.
택시는 인터콘티넨탈 레지던스 건물 맞은편 병원 입구에 우리를 내려줬고, 일단 응급실로 향했다. 학생증을 목에 건 레지던트로 보이는 젊은 의사 선생님은 아들의 배를 보더니 응급상황이 아닌 것 같다며, 오른편으로 나가서 일반 진료 접수를 하라고 알려준다. 배가 이렇게나 불러있는데 응급이 아니라고? 이 시간에 일반 진료를 보라고? 의심하면서 오른편으로 돌아나갔더니 접수대가 있고 제법 많은 베트남 아이들이 엄마, 아빠 품에 안겨서 기다리고 있다. 일반 진료가 있긴 한가 보다 하면서 우리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아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울더니 방구를 뿌부붕 낀다. 지독한 냄새다. 밤기저귀를 떼지 못해 채워놓았던 기저귀에는 설사가 묻어있다. 기저귀를 본 순간 아, 다행이다. 큰 병은 아닌가보다, 복수가 찬 게 아니라 가스가 찬 거였구나 하면서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곧 달아서 토를 하더니 속이 좀 편해졌는지 아들은 엄마 품에 안겨 다시 잠이 들었다. 이런 중에 우리 번호가 되어 진료실 안에 아이를 안고 들어가니 나이가 제법 지긋한 여자 의사 선생님이 계신다. 우리 가족만 진료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 번호 환자와 가족들도 함께 기다리며 진료를 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아직도 짧은 베트남어로 아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방금 방구, 설사, 토를 했다고 하니 이리저리 몸을 확인하고는 배에 가스가 찬 것 같기는 하나, 초음파로 확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시간에 초음파라니요? 다시 진료비를 내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알려준 병실로 가니, 문은 닫혀있고 자그마한 벨이 하나 보인다. 벨을 누르니 머리에 까치집을 제대로 지은 초음파 담당의가 진료실 문을 열어 아이를 받아 눕히고는 복부 초음파 촬영을 했다. 다시 내려와 소아과 선생님을 만나서 초음파 결과를 확인한 후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5시쯤 집으로 돌아온 우리 넷은 아침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잠을 잤다.
일어나 예전처럼 물렁물렁해진 아들의 배를 쓰다듬으며, 나는 큰 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감사해하고 있었다. 남편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그 병원은 어떻게 알고 가자고 했냐고 물어본다. 소아과 전문의가 그 새벽에 진료하는 걸 알고 있었냐고. 나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1군에서 2군 우리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많이 본 병원이기도 하고, 가끔 가는 바실리코 식당 맞으편으로 본 병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말 새벽에 소아과 전문의가 진료를 하는지도, 그 시간에 초음파와 엑스레이 촬영이 가능한 곳인지도 몰랐다. 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외국에서 아이가 아프면, 그것도 새벽이나 밤이면 참 난감하다. 언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서 떠 올라 그날 새벽의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아직은 쓸만한 머리인가 싶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 초능력과 같은 힘을 발휘하듯이, 엄마의 거의 초능력과 같은 기억력이 발휘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알아두면 좋아요
Benh Vien Nhi Dong 2
주소 14 Ly Tu Trong, Ben Nghe, TP.HCM
(Nguyen Du 거리 입구가 신축공사한 건물 / 응급실과 야간진료실이 있음)
전화 028-3829-5723
특징 24시간 진료. 소아과 병원으로 호치민시 보건부 소속 공립병원
J.Sa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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