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은 베트남의 공휴일인 남부해방기념일 43주년이다.
1975년 베트남 군의 사이공 점령(해방)으로 마무리된 베트남전쟁은 단편적인 역사의 관점에는 이념적 도미노 효과를 야기시킨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전후 전세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현재의 국제사회의 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만든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베트남 전은 아시아의 냉전정세를 바꾸었으며, 서구의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출구 전략’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으며, 경제적으로 ‘변동환율제’의 도입을 불러옴으로써, 전혀 다른 지역에서의 일이 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나비효과를 부른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지는 베트남의 43주년 해방 기념일을 맞이하여 <베트남 전쟁과 국제적 나비효과>라는 제목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세계적 변화를 짚어보았다. 조금 길고 지루한 글일 수 있으나 이곳에서 생을 영위하는 한국교민들, 특히 전쟁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좋은 공부가 되리라는 의도로 작성한 글이다.
제 1 나비효과 : 출구전략이라는 용어 탄생
독자들은 모두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출구전략’이라는 단어를 신문지상에서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베트남전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출구전략’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경기침체기에 경기를 부양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각종 완화정책이 경제에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서서히 정착시키는 전략을 말한다. 또 군사적으로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끝내는 전략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단어는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60년대 월남전 당시부터 미국의 국방성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베트남전의 국제적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미국의 선택한 이 ‘출구전략’은 미국의 아시아 국가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는 나비효과를 불러왔으며, 궁극적으로 1975년 베트남 통일로 이어지게 되는 일련이 사건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실질적 패배를 맛 본 전쟁이다. 건국 이래 전쟁 승리만 경험한 미국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와 패배라는 경험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베트남 전에서 미국 정부는 미군의 베트남에서의 철수 시기가 다가오자 세계 최강국이라는 나라의 체면을 지키면서 패배를 인정하여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전략명이 키신저가 제안한 ‘출구전략’이다. 이 용어이자 전략은 미국이 명시적으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질적 패배를 관리하고자 하는 정책적 목표로써, 압도적 승리만 경험한 미국에게 처음으로 직면한 패배의 과제를 풀어가는 용어로 탄생되었다.
• 미국내의 인종 및 계층 갈등 심화, 미군의 모병제 실시.
베트남 전은 미국의 국내 상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대부터 시작된 인종차별 철폐운동과 이로 인하여 파생된 사회갈등과 계층갈등이 베트남전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베트남전에 주로 참전했던 군인들은 영화 Forest Gump(1994)에서 나타난 것처럼 저 소득 저 학력층 백인과 흑인들이 주로 참전하였다. 장교들은 주로 대학수준의 교육을 받은 이들로 구성되었다. 1967년까지는 승전소식만 들리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1968년 구정공세 후였다. 특히 미국대사관이 점거되는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며, 그 이후 급격히 증가한 미군 사상자 수는 미국의 작은 농촌마을에도 반전여론을 형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군내부에서도 사회적 계층 갈등이 이 표출되는 여러 사건들이 발생되었는데, 심지어 사병들이 간부를 살해하려는 프래깅(Fregging)이라는 행위가 전후 공식 조사로도 900여건이 발생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이었다. 이렇게 미군내부의 병폐가 드러나자, 1969년 당선된 닉슨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미군을 모병제로 변화하는 조치를 1971년 취하게 된다.
이것이 베트남 전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출구 전략이었다.
• 닉슨 독트린 발표
‘출구전략’의 두 번째는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으로 표출되었는데, 이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로 불린 ‘닉슨 독트린’이다. 닉슨은 베트남 전의 고착화로 인한 정치적 불리함을 관리하고자 징병제를 폐지하며 국내적인 갈등을 봉합한 뒤, 적절한 시기에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군시킬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국제정치 용어에서
‘베트남화’로 불리고 있는,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1. 미국은 아시아 각국과의 조약상의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는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1.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각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1. 아시아의 각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여러 나라 상호 원조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1. 아시아의 각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이 정책은 미국이 베트남전 종전을 위하여 기존 포위정책에서 데탕트로 불리는 유화정책으로써 대 공산권 외교를 대거 수정하는 데에 기반이 된다. 그러나 1972년 1월 닉슨은 전격적 중국방문은 미국 동맹권에 속한 아시아 각국의 정책당국자들에게 자신들의 외교정책을 대거로 수정해야 하는 과제를 제공한다. 특히 일본은 닉슨의 중국방문이 자신들에게 사전 통고도 없이, 깜짝 방문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으며, 미국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닉슨 독트린의 나비효과 영향은 한국에도 미쳤다. 당시 박정희 정권도 데탕트를 감지하고, 대북정책을 기존의 대결국면에서 대화국면으로 대거 수정하게 되고, 7.4남북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대화를 실행한다. 또한 미국이 72년 중국과 공동 발표한 샹하이 커뮤니케(Shanghai Communique)를 통해, 닉슨 정권이 아시아에서 미군철수를 약속하자, 이러한 불안함과 남북유화분위기의 동시조성은 1972년 4공화국 유신정권 탄생의 배경이 되며, 또한 아시아 지역 내 베트남전 참전국이었던 태국, 필리핀에서도 한국의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적 체제를 강화되게 된다.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미-중 외교관계의 정상화라는 소득을 얻은 미국은 궁극적으로 닉슨이 설파한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며, 1973년 파리평화협정으로 ‘출구전략’의 결실을 얻게 된다.
이렇게 베트남전에서 탈출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 ‘출구전략’이라는 단어는 1975년 이후 불리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묘책으로 사용되고 동시에 군사, 외교, 심지어 경제학에서도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전략의 대명사로 쓰이면서, 2000년 이후에는 경제학 용어로 정착하게 된다.
제 2 나비효과 : 변동환율제의 탄생
또한 베트남전쟁은 역사적으로는 2차대전 후 세계경제를 지탱하던 국제적 화폐 체제인 브래톤 우즈(Breton Woods)체제가 붕괴되는 계기로 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환율이 매일매일 바뀌는 변동환율이 당연한 세상에 살지만, 사실 1971년 미국의 달러화의 금태환을 정지하기 직전의 브레톤 우즈 체제 내의 세계는 고정 환율제도가 전부인 세상으로, 환율 변동은 정치적인 행위로써, 정부만이 조정할 수 있던 기능이었다.
1971년 베트남전쟁에 소요되는 달러화 발행이 증가되면서 이로 인한 금 보유고 부족으로 인해, 미국 달러화의 금 태환 기능을 정지시킨 닉슨 대통령의 조치는 세계금융의 기본 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런 달러화의 가치 변동으로 고정환율제도는 일부 공산권 국가를 제외하면 1973년 이후 자본주의 혼합경제 체제에서는 사라지게 되며 그 이후 환율은 상시로 바뀌는 변동환율체제로 전환된다. 이로 인하여 각 국가들은 독립적 통화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되지만. 제 3세계 국가에서 외환위기로 대표되는 금융위기가 만성화 되는 경향이 유발되고,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게 된다. 현재 익숙한 ‘IMF구제 금융’ 같은 용어들이 일상화 되는 계기가 바로 베트남전으로 인한 경제적 변화 중에 하나다.
• 정경 유착을 불러옴
또한 베트남전의 여파는 미국정부의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재정적자와 경기침체가 심화되며, 70년대 중엽에는 뉴욕 시 및 여러 지방정부의 파산위기를 부른다. 이때 중요한 변화는 금융계가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지방정부의 재정부처 자리에 금융계 인사가 임명하게 되며, 이로 인해 정부의 경제적 역할이 저 실업률 유지를 중심으로 한 분배중심의 정책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저 강도 개입의 시장중심 성장정책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바꾸게 되며 금융과 정치의 벽이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선진국의 경제, 재정 운영에는 금융계 인사의 임명이 늘어나게 된다. 이들의 활약은 70년대 1차, 2차 오일쇼크 및 80년대 초 세계적 불경기에서 경제를 구하는데 일조를 했지만, 궁극적으로 80년대 이후 금융계와 정치계의 유착이 커지게 되어,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불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결론
크게 보아 베트남 전쟁은 ‘아시아 정세의 변화’와 ‘국제적 경제운영의 변화’라는 2가지의 나비효과를 만들고 종결되게 된다. 그리고 전쟁 당사국인 미국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베트남 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에 재정난 경제난을 유발하여 긴 어둠의 시기를 강요하게 되는데, 특히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은 “Baby Killer”라고 불리면서 사회적 멸시와 굴욕을 견뎌야 했으며, 또한 베트남에서 만연했던 미군의 헤로인 투약 행위로 인한 마약밀매 및 범죄의 증가, 그리고 뉴욕 및 지방정부의 파산으로 인한 도시의 쇠퇴는 한동안 세계인에게 미국은 범죄가 난무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정도로, 미국과 서구사회에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처에서 벗어나는데 15년 이상이 걸렸을 정도로 베트남 전은 미국과 서구사회에 상당한 정신적,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만든 전쟁이었다.
베트남 역시 오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 1986년 발효된 도이머이 정책을 시작으로 과감한 경제 정책을 시행하여 지금은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경제 성장율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로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는 올해 북미정상회담 및 남북정상회담 등의 이벤트가 예정되어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나비효과를 부르고 미래에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겪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역사라는 지울 수 없는 면밀한 기록과 경험을 통하여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 글이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요즘, 우리에게 미래의 길을 찾는 하나의 교훈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ric Han: kosdaq6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