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거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적 동물이 되었음에도 사회적 동물의 본능과 특성보다는 사회를 구성하기 이전의 본능과 특성에 더 많은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그러다 보니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타인을 도와주고 협력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해 이용할 도구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인간이 거대한 사회를 구성했으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니 생긴 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는 사실 철학자였다. 그것도 인간의 본능과 도덕심을 연구하는 도덕 철학자였다. 그의 역작인 ‘도덕감정론’은 매우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 감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찾은 답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적 존재는 도덕적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의 내면에 진실되고 공정한 관찰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의 이기심은 이 내면의 ‘관찰자’에게 한 번 제어되고 다시 사회의 도덕적 허용 범위에 의해 제어되어 사회를 유지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이기심은 제어 될 수 밖에 없고 제어되지 않는 사회는 붕괴되어 대체될 것이기 때문에 이기심은 선악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눈에 훨씬 더 큰 문제는 다수의 욕구를 억압하고 소수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봉건주의나 중상주의였을 것이다. 탐욕도 결국은 경제적 이기심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기심을 추구하더라도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고 오히려 사회와 국가의 공익을 극대화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바로 ‘자유 시장 체제’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자유 시장’이란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적 공익으로 전환하는 도구였고 부유한 국가란 사회적 공익이 극대화 된 국가를 의미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말한다. “다수의 국민이 부유하지 않은 국가는 결코 부유한 국가라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만약 아담 스미스가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라는 이중성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통찰을 가지지 못했다면 자본주의나 자유 시장 체제를 결코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바로 이 이중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기적 본능을 억제하기보다는 이기적 본능의 추구가 사회 공익을 실현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사회 체제를 찾아야 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생각이 맞을 뿐 아니라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아담 스미스, 칼 막스, 그리고 존 케인스를 꼽는다.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철학자였고 인류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알고자 했으며 인간들이 고통받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실증적인 해결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자본주의의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와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막스는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담 스미스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은 누구보다 칼 막스였다.
칼 막스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아담 스미스의 자본주의가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래서 칼 막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자본론’이다. 만약 칼 막스가 아담 스미스가 보았던 문제가 무엇이었고 왜 시장 경제 체제를 그 해답으로 내놓았는가를 알지 못했다면 아담 스미스가 구상했던 자본주의와 현실로 보여지는 자본주의의 괴리를 심각한 왜곡 현상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 스미스가 가졌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무엇이 잘못돼 버린 것인지를 평생을 바쳐 파헤치지 않았을 것이다.결국 칼 막스는 아담 스미스가 생각했던 자본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칼 막스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었을 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도덕경에 보면 ‘천리지행 시어족하(千里之行 始於足下)’라는 말이 있다. 천리길도 한걸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축지법을 쓰는 사람이라도 한걸음에 천리를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한 번에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은 천리길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아담 스미스나 칼 막스가 너무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해답을 찾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아담 스미스, 칼 막스, 존 케인스와 같은 사람들이 남겨 논 발자국을 쫓아 한걸음 한걸음을 보태다 보면 결국은 해답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발자국을 남기고 간 이후에 인류의 지식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뇌과학, 인지심리학, 행동경제학 등 인간의 진화와 존재를 이해하는 지식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래서 그런 지식 확장의 혜택을 빌려 생각해 보았을 때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방향이 옮지만 간과한 부분도 몇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회적 본능을 어떻게 더 활성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했던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었다면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스가 구상한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오만을 내려놓고 자연에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분명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개미와 벌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