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전공이 철학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사주를 봐 달라. 관상을 봐 달라, 작명을 부탁한다’는 반응이 많은데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만났던 사람에게 제 전공을 얘기하자 ‘철학은 국가의 기초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철학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는 미국이나 중국에서 훨씬 더 쉽게 볼 수 있더군요”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로만 살다 간다. 그래서 ‘시선’은 인간의 모든 삶을 규정한다. 우리 나라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더 탁월한 시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중진국 시선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혁신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 혁신이 제품 혁신에 머물 뿐 정작 더 중요한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단계 더 높은 시선을 가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적, 문화적, 인문적 시선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미국이나 중국과 그렇지못한 한국의 차이를 과거 혹은 현재에 세계를 이끈 선진국 경험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나 역시도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 혹은 ‘눈높이’에 의해서 모든 것이 규정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위로 하늘을 쳐다보면 우물의 깊이와 우물 입구의 모양에 따라 동그랗거나 네모난 아주 작은 하늘을 본다. 그것이 개구리가 알고 이해하는 하늘의 전부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최진석 교수의 말대로 ‘눈높이’는 인간의 모든 삶을 규정한다.
‘눈높이’가 정해지는 요소를 나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한다. 그것은 통찰과 역사적 경험이다. 통찰은 개인적 ‘눈높이’를 규정하고 역사적 경험은 집단 혹은 공동체 사회의 ‘눈높이’를 규정한다. 통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오늘은 역사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007년 봄 어느 날 나와 함께 일하던 대학 동기가 나에게 물었다. “노무현은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을 거라고 생각해?” 그 당시는 노무현 정부 말기였다. 당시에 참여 정부는 실패한 정권, 무능한 정권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고 무엇이든 다 ‘노무현’의 잘못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이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었다. 나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역사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역사적 경험의 유무에 따라 ‘눈높이’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역사적 경험의 차이로 사고와 판단, 그리고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좋긴 한데 너무 ‘이상적’ 혹은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체념이 우리 의식 너머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며 우리나라에 보수층의 비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구한말 조선을 찾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들’이라는 책의 발췌본을 아주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 영국의 유명한 여행가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날카로운 관찰과 자료 수집, 그리고 상세한 기록을 책으로 출간했다. 1892년 그녀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추대되어 회원이 되었는데 최초의 여성 회원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집필은 학문적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녀가 책을 쓰기 위해 네 번을 방문한 국가는 조선이 유일하다. 그녀가 조선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눈에 비쳐진 조선인들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크를 방문했을 때 그녀 스스로 털어놓기를 ‘조선에 있을 때 나는 조선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의견을 수정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비숍이 발견한 조선인 자치령의 모습은 부유하고 근면하며 우수한 성품을 지닌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후에 비숍은 ‘여행자들은 조선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그들의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모든 것을 부패한 관리에게 빼앗길 것을 알고 있고, 가난은 그들에게 최고의 방어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잘생긴 민족이며 말귀를 알아 듣는 총명함을 타고난 민족이다. 관아의 협잡꾼들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하게 책정된다면 조선 사람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썼다. 그리고 프리모르스크 방문 마지막에 비숍은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비숍의 눈에 비친 조선 관아의 모습은 한결같이 ‘하릴없이 관아 마루에 삼삼오오 모여서 곰방대를 피워 물고 관리들에게 아첨하며 어떻게 자신들의 배를 채울까를 궁리하는 기생충들로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내가 오래 전에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 중의 한명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하나도 없네.” 그 말은 내게 참으로 뼈아프게 들려왔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결국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우리이기에 설사 힘 있는 자의 갑질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그것을 체념하고 그런 세상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해보려고 발버둥 치다 결국은 같은 역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란 말인가?
나라를 빼앗기고 말과 이름을 빼앗기고 온갖 수모와 착취를 받으며 종국에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전쟁의 총알받이로 피 토하며 죽어가고 우리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성 노예로 끌려가서 외친 그 피맺힌 절규의 역사를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정말 형편 없고 못난 조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고맙다. 그가 정치를 잘했건 못했건은 솔직히 내 관심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의 집권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눈높이’를 갖게 되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 주저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한 동 준 윌리암스 대학교 경제학, 수학전공 / 전 아메리칸 하이어 에듀코리아 대표/ 청담어학원 ‘NAVI’ 프로그램 개발 / BCM k-12.com 헤드컨설턴트/ 현 유테카 대표이사
좋은 얘기인 듯 하여 읽기 시작핸는데 느닷없는 노무현 얘기로 김이 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