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가 집필한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국 영화다. 그런데 번역이 좀 이상하다. 직역을 한다면 ‘노인을 위
한 나라가 아니야’가 맞지만 이 경우, 주어가 사라지니 느낌이 이상해진다. 한국어 영어 제목처럼 되려면 That 대신 There가 들어감이 맞다. 그러나 이 원제는 아일랜드 시인 월리엄 버틀리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 누가 손댈 수 없는 노릇이니 그대로 두고 나름대로 의역을 한 것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울리는 의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에서도 상영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숨을 곳이 없다’ (khong chon dung than)라는 제목을 붙였고, 일본에서는 축소 지향형의 일본인 성향답게 ‘노 컨트리’라고 짧게 자르고, 중국의 경우 ‘늙은이가 기댈 곳이 없다’로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 영화의 제목만으로도 아세아 각국의 문화의 특성이 조금은 보이는 듯하다. 이 영화는 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를 감상한 후 일차적인 느낌은 잔인한 스릴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스릴러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뭔가 피상적인 것 이외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무지 분명하지 않은 영화의 결론이 뭔가 은밀하게 담겨진 의미를 찾으라고 우리를 유도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노인이란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이다. 만약 이 사회가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예측가능하게 흘러가는 곳이라면, 노인들은 충분한 대접받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지혜로운 노인들만 있지 않고, 노인이 늘 우대받지도 않는다. 우연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누군가 선한의도로 행한 일이 곧 악몽이 되어 찾아오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매일 일어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의 이치를 잔인한 살인마들을 불러다가 그려내고 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피상적인 시각으로는 짚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그런 난해한 작품이었다. 최근 이 영화가 문득 생각난 것은 요즘 한국의 상황이 이 영화가 상징하는 것들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영화에서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로 분장한 토미리 존스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며 자조적인 푸념을 뱉어 놓는다. 이 나라 어딘가에는 노인의 사회보장기금을 가로채기 위해 그들을 납치한 뒤 앞마당에묻은 젊은이들이 산다. 자기의 관할 구역에선 몇일 사이에 수 많은 사람이 그것도 소를 잡을 때 쓰는 스턴건에 이마가 뚫린 채 살해 당한다. 범죄자들은 보안관을 향해 총을 그들을 목 졸라 죽이고 차 트렁크에 넣어 불태운다. 곳곳에 마약이 있다. 학생들이 그것을 산다. 뉴스에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줄을 잇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들이다.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뉴스를 흘려 넘긴다.
늙은 보안관 벨의 어쩔수 없는 한계와 요즘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다. 보안관으로서 자신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지만 현실적으로 무력한 자신의 능력에 자괴감을 느끼는 그를 보면서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오버랩 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세상에 가장 경계해야 할 집단이 바로 한반도 상부를 차지하는 우리의 주적 이북이라는 기존의 가치로는 이해조차 쉽지 않은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이미 노인이 된 마당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전부여야 하는 기성세대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바로 코앞에서 살상무기를 들고 날 뛰는 어린 갱단이 이웃하고 있지만 스스로 할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한국, 그나마 동네에서 가장 거대한 저택들 틈바구니에 끼어 사는 불안한 처지다 보니 이웃들이 서로 내가 보호해 줄 테니 이것 좀 해라, 저것 좀 해라 하며 집적대지만, 정작 스스로는 아무런 결론조차 내릴 수 없는 딱한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식구들끼리 이 큰 집과 친해야 한다, 저 큰 집을 무시하면 안 된다 하면서도 서로 죽고 살듯이 다툼을 벌인다.
최근에는 그 양상이 더욱 악화되어 마치 영화에서 죽음을 부르는 살인자 안톤 시거가 동전을 던져 삶과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장난 같은 운명 앞에 우리가 벌거벗고 마주하고 있건만, 정작 우리 식구들은 그런 거 지난 70년 동안 매번 있었던 얘기라며 별다른 관심조차 주지 않고 여전히 내부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변화가 있다고 해도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방해만 없다면 특별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차고 당당한 국민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국민인지 도무지 가름이 안 된다. 이미 과거에 그런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릴 때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를 경험한 어른들이 이런 저런 조언을 해 보지만, 젊은 식구들, “됐거든, 세상이 달라졌거든, 그리고 우리는 노인을 위한 집안이 아니거든”하며 코웃음을 날리며 무시한다. 그리고는 오직 동족을 파괴하는 무기 개발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는 깡패들에게 핵무기를 만들라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던 세작같은 인간,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지, 하는 짓마다 헛 삽질을 거듭하는 너절한 인간, 자신의 말대로라면 벌써 정계를 5번은 은퇴하고 남았을 그런 헛소리꾼을 나라의 수장으로 뽑겠다고 하니 이 무슨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국민을 3백만이나 죽인 주적에게 먼저 달려가겠다는 인간과 같은하늘 아래 숨도 쉬기 싫은데 하물며 그 인간을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설마, 하늘이 우리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는다면, 정치 이념도 없고 인생의 철학도 보여주지 못하고 되는대로 떠들다가 실수만 반복하는 정체불명의 좌빨 부역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본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온통 혼란에 빠져있는 현재 지구촌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이번 선거만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사건도 없을 것이다.
한가지만 명심하고 투표를 하자.
미래를 위한 대통령을 뽑자.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총알처럼 빠르게 바뀌며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청산 대상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입 버릇처럼 적폐청산을 운운하며 국민 갈등을 조장하는 과거 지향형의 인간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다. 늘 미래를 말하는 사람, 항상 고개를 들고 높은 시각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함께 할 사람이라고 믿는다.
자, 누가 미래를 이야기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