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뢰헬
어렸을 적 동화책 속에서 읽었던 이야기 중에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옛날 동화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옛날 옛적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을에 동네 꼬마 여럿이 뛰어다니며 재밌게 놀곤 하는데, 그 아이들이 절대 뛰어놀지도 지나가지도 않는 오래되고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집에 사는 괴팍한 할아버지가 무서워서였죠. 하루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이들이 그 집 앞에서 떠들고 뛰어놀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으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나와서 “이놈들!” 하고 마구 소리를 지르죠. 아이들은 “엄마야!”하고 놀라서 달아나고, 그 후에 그 이야기 화자의 시선이 할아버지네 집 앞으로 옮겨집니다. 창문으로 엿 본 할아버지는 알고 보니 항아리였나? 도자기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인이었습니다. 세상 가장 행복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아까의 무시무시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흙을 밟으며 작업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 움직임이 마치 한 마리의 학이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오늘의 주인공의 그림 속에 옛날이야기 속의 그 할아버지 인상과 꼭 닮은 사람이 있더군요. 그림 속의 화가가 꼭 “이놈들!”하고 야단을 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그림은 <화가와 고객>이라는 1565년 경에 피터 브뢰헬(父)에 의해 그려진 그림입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9
화가가 피터 브뢰헬이면 피터 브뢰헬이지 왜 이름 옆에 아버지라는 뜻의 아비 부(父)자가 붙었을까요? 왜냐하면 브뢰헬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4대에 걸쳐 브뢰헬 집안에서는 계속 많은 화가를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부분 그의 작품을 카피하며 그를 계승하기도 하고, 나름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최고의 플랑드르(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일부 지역을 뜻함) 화가로 꼽히는 브뢰헬, 이름은 다소 낯설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이 있습니다. 계절의 이야기를 담은 연작 중 하나인 <눈 속의 사냥꾼>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대부분의 그림 설명을 보면 흰 눈과 청회색의 대비가 북유럽의 추위를 느끼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따뜻한 걸까요. 아니면 그 장면을 따뜻하게 화가가 연출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느끼는 눈 내린 풍경이 포근한 걸까요. 차갑지만 외면하고 싶은 시린 한기보다는 따뜻한 방 안에서 창가에 서서 따뜻한 음료를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냥꾼들과 사냥개들이 지나가네?’ 하고요.
사실 차도남인지, 따도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도시 남자인 브뢰헬이 종종 농민 출신으로 오해받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가 주로 농민을 즐겨 그렸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농민 브뢰헬’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보통 시골 사람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풍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뢰헬은 농민들을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고, 담백하게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그리곤 했습니다. <눈 속의 사냥꾼>에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걸 보면 그는 차도남이 아닌 따도남이였던 것 같습니다.
따뜻함을 넘어 끈적끈적한 더운 열기를 마구 뿜어내는 이 그림을 볼까요? 이 그림은 <농가의 결혼식>입니다. 이 좁은 화면 안에 이렇게 빽빽하게 사람들을 그려 넣다니.. 그리고 전혀 좁아 보이기는 커녕 앞에는 텅텅 비어 보이다니.. 그의 연출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결혼식을 가면 보통 신부의 얼굴을 궁금해하죠? 이 그림 속에서도 한번 찾아봅시다. 신부가 어디 있을까요? 찾으셨나요? 저 멀리 푸른 휘장 앞에서 관을 쓰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여인이 신부입니다.
브뢰헬이 살던 시대의 농민들은 결혼식을 저렇게 했었나 봅니다. 베트남도 한국과 결혼식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르죠? 하객들의 패션이 누가 신부인지 찾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피로연에서 노래자랑마냥 하객들이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기도 합니다.
눈 속의 사냥꾼, 1565년경
제가 처음 베트남에 오던 해, 잘 빌린 줄 알았던 집이 주말만 되면 거의 지옥으로 변하곤 했었습니다. 집 바로 뒤에 푸년 문화 회관이 있었는데, 평일에는 조용한 곳이더니, 주말만 되면 결혼식장으로 변해서 매 주말마다 오후부터 밤까지, 창문을 아무리 닫고 봉쇄해도 기어코 침입하는 노랫소리와 음식 냄새들로 돌아오는 주말을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왜 옛날이야기의 할아버지가 밖에서 나는 소음에 괴팍하게 변하셨는지 너무 이해를 하게 되었지요. 어라? 윗집에서 노래 반주에 맞춰 큰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 손님이 왔는지 노래방 기계를 튼 것 같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브뢰헬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봐야 하는데, 그러기엔 저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한 인간인가 봅니다. 창문을 열고 할아버지처럼 소리치고 싶네요. “이제 그만~!”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