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칼럼은 오랜만에 미술 퀴즈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림은 많이 눈에 익은 그림이죠?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입니다. 그림은 낯이 익지만 화가의 이름은 알듯 말듯 알쏭달쏭하다고요? 그럼 객관식 문제로 바꿔보겠습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
1. 얀 베르메르
2. 야콥 판 데르 메르
3. 베르메르 판 델프트
4. 요하네스 베르메르
5.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정답을 정하셨나요? 글의 제목이 ‘요하네스 베르메르’니까 당연히 ‘요하네스 베르메르’겠지! 하고 무조건 4.만 고르신 것은 아니겠죠? 사실, 다섯 개 모두가 정답이랍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베르메르는 그 시대 사람들과 그 후대의 사람들에게 위의 주어진 보기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게 서명을 하면서도, 공식 문서에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라고 썼다고 합니다. 다음에 소개할 작품인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뒤적뒤적하며 조사를 하던 중, 그림은 분명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인 것 같은데, 어떤 자료에는 얀 베르메르, 다른 자료에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라고 되어 있어서 한참 멘붕이 왔었습니다. ‘같은 작가인가? 같은 그림이니까 같은 작가겠지? 성이 다르거나 이름이 다르니 이건 자료의 오타인가?’ 하고요. 페르메이르는 베르메르를 ‘페르메르’ 혹은 ‘퍼르머르’로 읽는 그 지역의 발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시작부터 이름부터 참 알쏭달쏭한 작가의 느낌이 물씬 풍겨옵니다.
그의 대표작이며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그림과 달리 배경이 단순하게 되어 있어 소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소녀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하기 어렵고, 진주 귀고리와 터번으로만 살짝 힌트를 보일락 말락하게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전 신비주의 컨셉의 연예인들이 말을 아끼고 TV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절제하며 수수께끼처럼 표현하고 있어 이 그림의 신비로움에 더욱 빠져듭니다. “내가 누구게?”“나는 뭐 하고 있게?”하고 소녀가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그림은 제가 요 근래 갑자기 푹 빠져버린 그림인 [우유를 따르는 여인]입니다. 이 그림을 꽤 오랜 시간 알고는 있었지만 초현실주의에 빠져서 미술을 시작했던 저에게 이 작품은 너무 고요하고, 너무 잘 그려서 지루하게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림 감상을 편식했던 거죠. 20살 이전까지 편식이 심했던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먹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오로지 고기만 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야채도, 회도 먹지 않았었던 되돌아보면 ‘이렇게 맛있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했던 날들이 있었죠. 이제 여러 가지 다양한 맛을 알아가는 것처럼 맛없게만 느껴졌던, 먹기 싫었던 이 그림을 자꾸자꾸 음미하고 싶어지더군요.
진주 귀고리만 하고 있는 소녀보다는 이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인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인은 어떤 계급의 사람인지, 여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 약 350년 전의 우유 단지에서 흘러나오는 우유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신선한 우유가 매일매일 퐁퐁 샘솟는 것처럼요. 소리도 들릴 것 같습니다. 조용한 부엌에서 졸졸 우유를 따르는 소리 가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데도 여전히 신비롭습니다. 베르메르가 그린 그날의 따뜻한 빛이 느껴집니다. 시간을 거슬러 그날의 햇빛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과 다른, 100년 전과 다른, 내일에도 없을 오직 그날만의 특별한 따뜻하지만 뜨겁지 않은 차분한 빛이요. 그래서인지 차가운 색인 파란색조차도 따뜻함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햇빛의 화석화라고 해야 할까요. 자신의 그림 속에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매일매일 만나는 평범한 빛을 담백하게 담아 놓은 그의 솜씨 덕분에 이 그림은 어느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하녀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르메르가 표현한 빛에 감탄하며 글을 쓰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제 작업실에도 오늘의 햇빛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따뜻한 햇빛 덕분에 베르메르의 작업실 못지 않은 화실이 되어있네요. 이 그림을 보면 베르메르의 작업실을 살짝 엿볼 수 있거든요. 전문가들이 ‘회화의 예찬’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던 이 작품 ‘회화의 기술’ 은 베르메르가 가난에 시달리며 작업실에 작품이 한 작품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도 이 작품만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작품 속의 들어오는 빛을 보니, 지금 우리 화실에 들어와 있는 빛 역시 전혀 뒤처지지 않네요. 역시 빛은 대단합니다. 베르메르의 시대나 지금이나 공평하고 아름답습니다. 자꾸 상상하게 되네요. ‘여기에 베르메르가 있었다면 이렇게 그렸을까?’
‘어느 부분을 노랑과 파랑으로 바꿨을까?’ 햇빛을 마주할 때마다 베르메르와 함께 작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작업한다면 긴 작업 여정이 외롭거나 힘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글은 다 썼고, 수업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이제 저는 베르메르를 만나러 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