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문법은 파괴되고 있다

전통적인 교수법을 사용하는 많은 영어 강사들은 영어 실력을 갖추는데 있어서 “문법은 뼈대이고, 어휘는 살이다”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습니다. 문법은 영어 실력의 기초를 구성하는 한편, 어휘를 많이 알아야 영어 실력이 완전체가 된다는 믿음이지요. 이 명제는 거의 모든 영어 전문가라면 부인하지 않을 터이지만,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데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달리 말해, “문법은 뼈대”이자 기초이니, “문법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문법 책이나 문법 강의를 통해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어려서 부터 영어를 익히는 학생들에게 기성세대들이 학창 시절 바이블처럼 생각하고 공부하던 “성문기초영문법,성문기본영어”, “성문종합영어” 시리즈와 같은 문법책을 공부시키는 부모님은 이제 더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어려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는 믿음으로 다양한 책을 접하게 하는 방식이 어린 학생들에게는 분명히 효과적이고, 그 때문에 “영어독서” 전문학원이나 프로그램들도 최근에는 우후죽순 생기고 있습니다.

토플 시험에서 “문법” 영역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2005년에 “쓰기영역(많은 학생들이 문법영역이라고 부르는)”을 신설했다가 2016년에 내용을 바꾸어 시행하고 있는 SAT 시험에서는 “문법”을 “문법”이라 부르지 않고 “표준적인 영어의 관습(Standard English Conventions)”라는 다소 기괴하고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현대 영어에서 “문법”의 중요성, 혹은 필요성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리고 “문법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지만 영어의 고수가 되거나 영어 관련 능력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사례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저와 함께 공부하다가 서울대에 진학한 학생 한 명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 학생은 학교 성적도 우수했지만 영어 능력시험인 토플과 미국의 수학능력시험인 SAT 모두에서도 초 고득점을 받아서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동시합격했고, 진학은 서울대를 선택했던 학생입니다만, 한번은 수업 시간에 (토플 시험은 이미 끝내고 SAT를 공부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선생님, 형용사는 무엇이고, 부사는 무엇이에요? 차이점을 잘 모르겠어요.”

문법은 뼈대이고, 어휘는 살이다, 라는 믿음을 굳게 실천하는 선생님이라면 “넌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하니?”라는 반응을 할 법도 한 질문이었지만, 간단 명료하게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준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학생은 그 때 그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형용사,” “부사”라는 용어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문법 용어의 개념을 아는 것이 영어 실력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칼럼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문법 공부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문법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본지 298호, 300호, 302호 등 세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왜 문법에 대한 중요성이나 필요성이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영어가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라는 언어는 (우리말이나 다른 모든 언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새로운 어휘가 생겨나기도 하고, (기술 발전이 심화하면서 관련 어휘도 같은 속도로 많아지고 있죠. 기성세대가 학생들이었을때 “스마트폰”이나 “이메일”같은 단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개념이었죠) 예전에 많이 쓰던 어휘가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같은 단어인데도 예전에 통용되던 뜻과는 다르게 쓰거나 의미가 추가되어서 혼란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어의 변화는 다만 어휘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어의 뼈대라고 하는 문법 또한 과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셨으면 합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이란 언어 “현상”을 정리해서 설명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몇가지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의 종류를 (품사라는 용어를 씁니다) 8품사라고 주장하는 책도 있고, 12품사다,라고 설명하는 책도 있습니다. 동사의 시제는 3개다, 6개다, 12개다 등등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론이 맞고 어떤 이론이 잘못되었다를 따지는 일은 언어학자, 문법학자들이 하면 될 일입니다. 영어를 학업과 직업과 생활에서 활용하기 위해서 익히는 우리들은 문법에 집중하기 보다는 “현상”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될 터입니다.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문법 이론이 존재하지만요.)
영어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휘 뿐만 아니라 문법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법이 변화하는 중심에는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으며, 이 특징에 대해서는 모든 언어학자가 동의를 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바로 “문법 파괴”입니다. “법칙”이 파괴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현상들을 “법칙”으로 정리하기가 복잡해지며, 그 복잡한 과정은 학자가 아닌 이상 그닥 불필요한 일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문법이 파괴되고 있는 예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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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물, 맥주 등은 소위 말하는 “셀수 없는 명사”들이어서, 영어로 갯수를 세려면 a cup of coffee (커피 한잔), a glass of water (물 한잔), a mug of beer (맥주 한잔) 처럼 단위를 나타내는 말을 써주어야 한다..가 원래 문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매장에 가서 저렇게 주문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two coffees (커피 두잔), three beers (맥주 세잔) 이라고 주문을 하면서도 전혀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Walk (걷다)는 소위 “자동사”라고 하여, 뒤에 목적어가 따라오지 않는 동사입니다만, walk a baby (아이를 산책시키다), walk you home (집에까지 데려다주다) 등으로 쓸 때는 뒤에 목적어가 따라옵니다. “꼭 읽어야 하는 책”을 “a must-read”라고 하거나, “꼭 사야하는 물건”을 “a must-have”라고 조동사와 동사를 붙여서 명사로 쓰거나,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를 “haves and have-nots”라고 동사를 명사처럼 쓰는 경우, 그리고 왠만한 가이드북에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뜻으로 “Do’s and don’ts”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된 일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법이 파괴되고 있으며, 우리가 영어를 접근하는 방식도 변화하여야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혹은 다음 번 커피숍에 가셨을 때, 아니면 업무 상 다루시는 이메일이나 문서에서, 파괴된 문법을 쓰는 영어 표현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호에서는 “동사의 세계에 살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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