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부터 과연 공부란 실제로 어떤 기본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가를 살펴보자.
아마도 여러분들도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라는 내용의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크게 틀리지 않은 얘기다. 실제로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그나마 일부라도 사용하며 온전하게 기억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미적분은 사회에 나와서 접해 볼 일이 없지만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연산이나 국어 맞춤법과 같은 것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사용하지 않는가? 결국 현실에서 실제 사용할 만한 것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배웠고 그 뒤로는 쓸 일이 없으니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을 엄청 배운 셈이다. 그러면 왜 이런 상황이 만들어 졌을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우리가 이해하는 공교육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량 생산이 시작되자 공지 사항이나 기본적인 설명서를 읽을 수 있고 재고 수량을 확인할 줄 아는 노동자들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이 수요가 공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공교육 시스템은 원래 인재를 육성하는 목적보다는 산업경제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4-5년만 교육시키면 충분했다. 즉, 원래 목적의 공교육 시스템은 초등학교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경제 분야는 물론 사회 전체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요구와 수요가 만들어졌고 공교육 시스템도 이에 맞추어 확장되었다. 문제는 산업경제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초등교육 뒤에 무엇을 교육시킬 것인가 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초등교육의 연장 선상에서 교육을 시키면 노동자 이상의 인재를 만들 수 없었고, 오랜 전통을 가진 엘리트 교육을 접목하면 초등교육과 그 괴리가 너무 컸다. 특히 공교육이 대량 생산의 원칙에 의거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개인별 맞춤 엘리트 교육방식과 아예 맞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억지로 엘리트 학습에 사용되던 콘텐트 중 일부를 공교육 시스템의 대량생산 원칙에 맞추어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추구점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수학을 생각하면 보통 숫자, 계산, 공식과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공교육 제도에서 배웠던 수학의 경험이자 이해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고대에서부터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온 수학 교육은 그런 경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일종의 고대 수학 교과서인데 내용이 이렇다. ‘원론’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정의 몇가지, 예를 들어 점, 선, 원, 직각, 평행선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 단순한 정의 몇가지를 가지고 삼각형의 내각이 왜 180도인지 혹은 피타고라스의 정의가 왜 맞는지와 같이 훨씬 복잡한 것들을 증명해 내는 교육이다. 그래서 이런 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수학을 생각하면 논리, 분석, 증명과 같은 것들이 떠오르고 숫자나 계산은 아예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공교육 이전의 엘리트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듯 만들 수 있는 것도 규격을 정해 놓고 불량품 가려내듯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가지를 결합해 놓았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라마다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는지에 따라 다른 형태의 보완책이 나왔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때는 꽤 즐겁고 재미있게 학교 공부를 하다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공부에 대한 관심을 급격히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서 식민지 시절부터 뿌리내린 ‘리버럴 아츠’ (인문 교육) 전통의 영향으로 공교육, 특히 중등 교육에서 얻어야 하는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내용을 습득하고 기억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풀어 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접근 방식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어차피 원리를 파고들어 그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원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우는 내용 자체가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예를 들어 미적분을 수학이라는 언어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데 유용한 표현 방식 혹은 문법이라고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잊지 않고 기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미적분이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움직임과 변화라는 새로운 물리학 개념을 수학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뉴튼과 라이프니츠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기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공교육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때문에 어차피 기억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을 통해 어떤 역량을 키우는 훈련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Analytical Reasoning’(분석적 논리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수학은 주어진 조건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분석적 논리 능력은 답을 내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 지를 찾는 능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과 뒤집어진 형태인 것이다.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중학교 수학에서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증명해야 하는 문제들이 외워야 할 답으로 주어졌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문제와 답이 뒤집어진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과 분석적 논리 능력이 뒤집어 진 것과 비슷한 경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공식을 외우고 답을 낸다고 해도 이 핵심 역량이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원리를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길게 나열한 얘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을 익히는 훈련이 주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 한 마리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먹고 살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면 평생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공부가 지식이라는 당장 한 마리 물고기를 얻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지만 고기 낚는 법을 배우는 훈련으로 삼으면 평생을 함께하는 자산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정답이란 인위적으로 재단되고 조정된 조건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진정한 공부 란 다양한 조건들 속에서 더 나은 답, 더 좋은 답을 찾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