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고 잘 기억한다. 그래서 글자를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자신들의 일을 이야기로 후세에게 전달했다. 그 이야기에는 조상들이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이 담겨 있다. 아직 세상 경험이 적은 후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귀한 지식이 이야기 형태로 전달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역사에는 공상 과학 소설보다 더 상상을 초월하고, 막장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허구로 만든 이야기인 소설이라 해도 너무 허황되고 개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황당하고 어이 없어 채택되지 않을 것 같은 막장 드라마가 현실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황당한 이야기가 담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재미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를 이야기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빠진 역사는 그냥 연관성 없는 데이터들의 나열일 뿐이다. 삼국지나 대망과 같은 역사 소설에는 엄청난 수의 등장 인물과 지명이 나오지만 그것이 내용을 이해하고 따라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사람들과 장소들을 경험하고 이야기의 배경이나 인물들의 동기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역사는 이야기라는 경험의 틀을 통해 지식을 체험하고 축적하는 과정이다. 아마도 링컨 대통령이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왜 링컨이 위대한가를 물으면 남북 전쟁 종결이나 노예 해방을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업적과 같은 결과물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링컨이 인간으로서, 지도자로서, 정치가로서 어떤 사람이었고 왜 위대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미국 워싱턴에는 링컨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 안에는 앉아 있는 링컨의 조각상과 함께 양 옆 벽에 각각 하나의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하나는 게티즈버그 연설문이고 다른 하나는 재임 취임사이다. 그만큼 이 두 개의 연설문을 빼고서 링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이 두 개의 연설문이 들려주는 링컨의 이야기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재임 취임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재임 취임사가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링컨이 재임에 성공하여 대통령 취임식을 하던 1865년 3월은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당시 미연방에 남아 북군으로 참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를 남부 반란군으로부터 지켜낸 전쟁으로 보았고 전쟁의 승리를 남부의 노예제도에 맞서 싸운 정의의 승리이자 신의 뜻으로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링컨은 취임사를 연설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이 노예 제도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중략) 양쪽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에 서주기를 소망했습니다. (중략) 하나님은 양쪽의 기도를 다 들어줄 수 없었고 어느 한편에 서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링컨이 위대한 인물인 이유
그리고 링컨은 여기서 마태복음 18장 7절을 인용한다.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우리말 성경에 같은 구절이 있기에 대신하려 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우리말 성경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 구절을 대입하면 아예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링컨이 인용한 의미대로 다시 번역해야 했다.
“죄악의 대가로 고통 받는 세상은 참으로 불쌍하도다. 하지만 죄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죄악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인간들은 참으로 불쌍하도다.”
만약 미국 노예 제도가 피할 수 없는 죄악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시간까지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죄악이라면, 그래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이 참혹한 전쟁은 그 죄악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인간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마땅히 알고있는 신의 정의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습니다.이 전쟁의 대재앙이 하루 빨리 떠나기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하고 열렬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250년간 노예주들의 착취로 얻은 부가 모두 땅속에 묻힐 때까지, 채찍으로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총과 칼로 흘려 갚을 때까지 계속 되야 한다면,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의 심판은 언제나 진실되고 정의롭도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아닌가? 링컨은 북부가 남부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노예 제도라는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미국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그 죄악으로 쌓은 부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그 죄악으로 흘린 피를 전부 갚을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이 다시 통합되는 과정에서 북부는 승자이고 남부는 패자가 아니라 남과 북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고 모두가 참회의 마음으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남부는 미연방을 탈퇴했고 그를 향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2번의 세계 대전을 포함하여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을 향해 반기를 들고 전쟁을 시작한 반란군을 어렵게 진압하고 자신이 승자가 아닌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남부가 자신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싸우는 적임에도 링컨의 눈에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들이었고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국민들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배워야 할 까닭
우리 민족도 지금 남과 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통일대박’을 언급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링컨과 이 재임 취임사를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3만에 육박하는 탈북자들이 정착해 있다. 위험을 무릎 쓰면서 삶의 터전을 박차고 떠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인구에 비해 적응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 계층으로 전락해 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대박이고 누구를 위한 대박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왜 우리는 링컨과 같은 지도자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