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히어로 제 24편
윙티지우(Nguyển thị Diệu) 거리 초입에서 깍망탕땀(Cách mạng tháng 8)거리를 따라가다 윙딘찌우사거리(Nguyển đình Chiểu)를 지나면 호쑤언흥(Hồ Xuân Hương) 을 만나게 된다. 사이공에 오래 산 사람들은 이 길 이름을 들으면 자리우 피부과병원(Bệnh da liễu)을 떠올릴 것이다. 현재 이 거리에는 안경을 파는 노점상들과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 길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여전히 빨강색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오는 Colette학교다. 이 학교는 예전에 부유층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이름난 학교다. 이곳에 1963년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정부에 대항해 분신자살했던 틱광득(Thích quảng Đức)승려의 동상이 세워진 공원이 있다. 윙티지우 거리는 1975년 이전 이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이공 토박이들에게 아마 이 길은 많은 추억이 서린 길일 것이다. 그 당시에는 3군 중심가에 인접한 그저 프랑스식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조용하고 작은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길의 모습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많은 고급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고 있다. 특히 최근에 윙티지우길에 인접한 바후엔탄관길(bà huyện Thanh Quan)에 있던 2900m2의 100년 이상된 고급 주택이 3,500만 달러에 팔리는 바람에 이 거리가 더 유명세를 얻게 됐다.
여성민족해방운동가 윙티지우 1926~1955년
윙티지우(Nguyễn Thị Diệu)는 득포군 떤퐁(Tân Phong,huyện Đức Phổ)에서 태어났는데, 꽝응아이 도비서 윙응엠과 고향이 같다. 그녀는 아버지는 윙히엔 왕조의 상서를 지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락자(Rạch Giá)에서 관직을 수행하던 아버지를 따라가 초등학교를 다녔다. 후에 그녀는 사이공에 올라와 Marie Curie 학교를 졸업했다. 깍망탕땀 혁명 당시 그녀는 사이공 구국 여성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여성항쟁운동 협력 당시 그녀는 베트남 여성 연합회의 집행위원회에 선출되기도 한다. 뜻하지않게 1950년 적들에게 붙잡혀 서남부 지역의 전쟁터로 끌려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여자의 몸으로 혼자 노를 저어 탈출에 성공해 여러 오지, 벽지를 다니며 해방운동 활동을 감행한다. 1952년 께싹(Kế Sách)지역으로 돌아가서는 농업세 징수업무를 맡았다. 제네바 협정 이후 그녀는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얻게 되면서 득찌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사립교육 협회에서 활동, 사이공-쩌런 평화운동에도 참여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1955년 7월 6일 응오딘지엠정권에 붙잡혀 투득에서 처형당하고 마는데 당시 임신중으로 뱃속에는 3개월 된 아이를 품고 있었다.
여류시인 호쑤언흥
호쑤언흥(Hồ Xuân Hương)은 베트남의 유명한 여류 시인이나 아쉽게도 그녀의 출생과 사망 그리고 삶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녀가 1772년 응에안 꾸인도이(Quỳnh Đôi)에서 태어났고 1882년에 탕롱( Thăng Long)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대시인 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했는데 그 시대는 떠이썬(Tây Sơn)의 반란과 약 30년간 이어진 내전 끝에 응웬왕조가 시작된 혼돈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들과 봉건시대를 지배하던 남존여비 사상은 호쑤언흐엉의 작품 주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쯔놈(chữ Nôm,한자)으로 작품을 썼는데 그에 비해 그녀의 작품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는 현대 베트남 문학계에서 “쯔놈 문학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호쑤언흥은 중세 베트남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하나로 여겨지며 파격적인 형식을 사용하면서 봉건시대 여성에 대해 두려움없이 언급하던 시인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곧 나라의 흥망성쇠와 여성들이 남존여비 사상에 의해 억압받는 시대를 경험했던 것을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